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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한번 태어나서 여러 개의 인생을 사는 방법

소설가의 삶

지금은 딱히 그렇지는 않지만, 한때 인터뷰 기사들에 빠져 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입으로 뱉은 말들을 정리해 놓은 인터뷰 기사들이, 그 사람을 설명하는 다른 어떤 종류의 글을 통해서 아는 것보다, 한 사람에 대해서 보다 진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 까 싶어서, 특히나 유명하거나 내가 관심이 가는 사람들의 인터뷰는 토시도 빼놓지 않고 자세하게 들여다 보곤 했었다. 


(나는 이상하게 영상 인터뷰보다는 글로 적혀진 인터뷰가 더 깊게 다가와서 글로 표현된 인터뷰를 좋아했다.) 그렇게 인터뷰 기사들을 읽고 있으면서, 이런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구나, 저런 스타일의 사람들은 또 저렇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가는 일들을 하는 동안, 나는 마치 내가 세상에 대해서 무언가 더 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꼭 내가 성장하는 것 같은 기분. 그래서 그런 글들을 읽는 일이 내심 좋았다. 


그렇게 접하는 인터뷰 기사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섭렵하던 시절,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배우가 했던 인터뷰의 대사는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깊었다. 

“배우란 직업이 가지는 장점이 무엇일까요?”
 “저는 한 개의 작품을 할 때마다 제가 맡은 그 배역의 인물로 살아요. 생각과 행동 모든 것을요. 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면서 일상에서도 마치 제가 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 하죠. 배우는 맡은 작품에 따라서 매번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인거 같아요. 어떤 때는 변호사도 될 수 있고, 어떤 때는 거리의 부랑자가 되기도 하고요.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다양한 삶을 경험해 볼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인터뷰를 읽고

 ‘그렇겠구나. 아 한번 태어나서 이토록 여러 종류의 인생을 경험해 볼 수 있다니, 참 좋겠다.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배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배우란 직업이 그 여배우가 인터뷰한 내용과 같은 그런 종류의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내게 깊게 들어왔고, 그런 면에서만 본다면 배우란 직업은 참 매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난 후 그 인터뷰의 대사는 잊혀진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그 것들은 완전히 내 머릿속에서 잊혀진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 어느 한켠에 아주 오래된 기억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인지,나는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는 중 문득 그때의 그 대사가 떠올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삶에 대해서 얘기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가로서의 장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중에 자신의 소설에 3인칭 시점도 도입하기는 했지만, 초반 20년간 줄곧 1인칭 시점에서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그렇게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 자신이 정말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기도 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진 것은 나 자신이 ‘거의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아,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일까, 한번 태어나서 여러 개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이 얼마나 수지 맞는 일인가? 누군가는 -가능하다면- 여러 번을 고생하면서 다시 태어나야 가능한 일텐데 고작 한번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여러사람의 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은. 


더군다나 만일, 그렇게 여러 개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면, 나는 보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보다 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총체적인 관점을 수립할 수 있게 되는, 혹시나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날이, 혹 죽기 전에 올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살면서 그런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뭔가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흥분이 내게 더 깊은 진동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그랬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가의 장점으로 내가 언젠가 부러워했던 그 배우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여러 양상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의 한계로 (비록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절실하게 느낀다고 해도) 배우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저 부러워 하고만 말았었던 그 삶이 소설가로 살아도 가능하다고 그는 이야기 했다. 어쩌면 작가, 소설가의 삶이란, 굳이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을 만큼의 절세 미녀로 태어나지 않아도(물론 내가 원해서 그런것은 아니지만), 아니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종이와 펜 (요즘은 노트북과 타이핑이 가능한 손가락)만 있다면 진입 가능한 일일테니, 혹시나 도전해 수 있을 만한 일이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레 드는 것.


내가 작년 여름 즈음부터 한창 책을 읽고 그 책을 읽은 감상을 기반으로 에세이를 작성해 보곤 했던 것은, 책을 읽고 난 후 드는 생각들을 그저 흘려 버리기에는 무언가 아쉽기도 했고, 또 그렇게 드는 내 생각들을 어떻게든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계속 내 안에서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네 아줌마들? 대상으로 독서모임도 작게 만들어 보고 그 안에서 이야기도 나누어보고 했지만, 그리고 그것도 즐거웠지만, 그래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2%가 늘 존재했다. 


그렇게 한껏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해도 남는 것 없이 허공에 뿌려지는 듯한 느낌이 내게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그래서 나는  그 생각들을 글로 한번 써보자 했다.  그러니까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까닭은,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 나를 알아봐주세요 하는 욕구,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일이 늘 즐거웠던 아이니까. 


내가 만약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면, 아마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로 나를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고, 내가 만약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내가 느끼는 것들을 무언가 음색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다고 느꼈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에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을 가장 가깝게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소질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약간 껄쩍지근 하지만, 그래도 친정 집에 내 어릴때 받아놓았던 상장들을 모아놓은 상자에서 그곳을 차지한 거의 대부분의 상장이 글짓기 대회 나가서 받은 것들이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내가 뭔가 나를 표현할 만한 도구를 찾는 다면 글을 쓰는 일이 가장 손쉬운 선택이지 않을까 하는 것. 물론 별일 없이 끄적이던 내용들이나마 조금씩 뭔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때는 굳이 이런 분석적인 검토 없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쓰기 시작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쓰기 시작한 내용들이야, 당연히 나는 나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무언가 끄적끄적 댔고, 이런 내용들을 쓰니, 나는 어쩌다 수필가라는 이름은 달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보니, 소설을 쓰면서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쓸 수 있으며, 또한 여러개의 나의 인생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뭔가 내 머리에 광채가 비치는 듯한 기쁨이 샘솟는 듯한 기분. 아, 기쁘다. 타고난 미모로 세상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번 태어나 여러 개의 인생을 살아 보는  수지 맞는 삶이 가능하겠구나. 


그래, 그렇다면, 이게 가능하다면 내게 닥친 현실, 내 진짜 세상을 사는 것도 어쩌면 훨씬 더 편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현실과 상관없이, 내가 원한다면 내 상상 속에서 너무 멋진 삶을 살 수 도 있을 테니까. 아니면 현실에서는 감히 도전해 보지 못하는 쌈빡한? 삶을 상상속에서 유쾌하게 해낼 수도 있을테고. 아, 나는 이제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는 세상에 억울해 하지도 않을 테고,  내가 원하는 내 세상을 스스로 창조해서 살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또한 그렇게 여러 개의 삶을 살면서, 그렇게 여러 인생들을 살기 위해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세심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지내는 동안, 나는 어쩌면 진짜 나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 또한 깨닫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어쩜 너무 기특한 삶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에헤라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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