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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한가함에 대하여

바쁜 하루를 보내고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보람차긴 한데, 뭔가 허전하다. (나는 어서 바쁜 상태에서 벗어나서 한가해 져야 한다.) 예전에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참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아, 굉장히 보람찬 하루인데, 뭔가 마음이 빈 것 같다고. 이렇게만 살면 안될 것 같다고 말이다. 바쁘게 사는 내 모습이 좋았지만, 늘 그 안에는 불안함이 공존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말들에 혹했다.


언제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문화적 예술적 성취는 물질적 정신적 여유로움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굉장한 문화와 예술이 탄생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 인간사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고 가치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여유로움에서 탄생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몹시도 바쁜 그대의 하루 중에 어찌 감히 사랑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 그대의 그 바쁜 삶이란 사랑이 머물기 힘든 삶이요, 어떠한 문화적 예술적 성취 또한 이루기 힘든 삶이지 않을까?


그러니,

“나 오늘 한가해요.”

라는 말은 내가 바쁠때나 그렇지 않을때나 늘 속삭여야 하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지향하는 우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유롭고 한가로움은 필수여야 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를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내게 우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여유와 한가함은 의식주의 해결을 기초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의식주를 지탱할만한 부유함을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 어떤 방법으로 한가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아마도 세상의 부가 여전히 세습되는 이유일 것이다. - 물론 부를 이룰만한 ‘두뇌’가 대물림 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만일 지적인 삶에서 부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지적인 삶을 영위할 만한 여유와 한가함을 뒷받침 해줄 ‘타고난 부’가 있는 사람이, 생계를 자기 손으로 유지해야 하는 사람 보다 그것을 갖기에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노동을 노예나 노비들이 도맡아서 해주던 때에 귀족과 양반들은 생계를 건사하기 위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그들은 개인의 성장과 인간의 영혼과 발전에 대해서 고민하고 토론하며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한 채로 누구나 자신의 생계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작금의 세대에, 타고난 (물려받은) 부 조차 얻지 못한 범인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한가롭고 여유롭게 인간의 영혼과 사랑에 대해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하여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서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부착하고 인간과 사랑에 대한 고찰에 자신의 인생을 들어부을 수있다는 말인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고귀하고 우아한 삶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해 보자면, 한가함을 얻기 위하여 그나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란, 물 밑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쉴새없이 발을 저어가면서 똥꼬에 불난 것처럼 뛰어다니는 생활을 하면서도, 물 밖에서는 한가롭고 여유롭게 노니는 백조같은 삶을 사는 것 뿐이지 않을까? 싶다. 누구에게도 나의 발버둥 치는 발은 들키지 않게. 우아하게 헤엄치는 모습만을 간직한 채로, 그렇게 때론 신비롭게. (그러니까, 실은, 바쁘지만, 안 바쁜 척 하는 것 정도 인 것일테지. 슬픈 현실은 늘 떠나지 않고 머무르는 법이니까. 우리는 늘 역설적인 인생을 살 뿐인 것을. 그저 자족할 뿐. )


그러니 나는 누구를 만나든지, 늘

 “응. 나 한가하지.”

 라고 대답한다.

 “요즘 어때? 바빠?”

 라는 그 또는 그녀의 질문에

“응 바쁘지.”

 라고 대답하는 것이 굳이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늘 바쁜척 하는 것은 왠지 시덥지도 않은 잘난척을 하는 것 같은 냄새를 풍기기도 하는 법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하느님도 일주일 하루는 쉬시고, 미국 대통령도 휴가를 가는데, 뭐가 그렇게, 그리도 바쁘다는 말인가. 하느님도 아니고, 미국대통령도 아니면서.)


사실 늘 바쁘게 산다는 것이란, 발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바쁜 사람들은 그 바쁜 일상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이미 확고한 생각을 가진 그대의 머릿 속에 내가 끼어들 여지는 본디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여나 당신이 나의 말이 들릴 만큼의 조그만 마음의 문이라도 열어두었다면, 가서 당신의 언저리에서 조그맣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그래도 한마디쯤은 건네고 싶은 오지랖이 있다.

“사실, 모든 발전은 고독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알잖아요. 사실, 우리 한량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 한가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요.  바쁜 삶이 얼마나 허망한 삶인가를요.”


어서 바쁜 생을 덜어내고 고독을 씹는 일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언가 내가 살았던 이 세상에 의미있는 것 하나 쯤을 남기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않을까? 바쁜 일상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멍 때릴 시간이 없는 것을. 사색할 시간이 없는 것을. 그대를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을. 그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그런 그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을. 그러니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고, 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을.


사랑을 모르고, 어찌 인간을 알 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고뇌 없이, 어찌 나의 성장이 있을 수 있을까?


아, 나는 바쁜 나의 하루가 뿌듯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취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쩌면 성장이 없는 기쁨, 또는 쾌락. 마치 마약과도 같은 것. 나는 기꺼이 고독함으로 들어가리라. 그리고 나는 늘 이야기하리라.


“나 한가해요.”

 라고.


(아. 내가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고독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있기를 바라면서도, 실은 누군가가 늘 옆에 있기를 바라는 것. 어쩌면 이래서 성장이란 힘든 것일 테다. 그래서 아픔이 있는 곳에 성장이 있는 것일테고. 아, 나는 내 생에 내게 오는 모든 아픔이란 모두 성장통인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해야겠다. 그러면 그 아픔을 지나는 중에도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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