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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너’가 ‘내’가 되는 순간

30’s, 30대 여인의 자화상, 나의 자화상

함께했던 탄생의 시간들


그가 한창 작품을 만들고 있을때, 나는 그의 작업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결혼을 하고 새로운 동네에 터를 잡게 된 나는 외롭기도 했으려니와, 그도 마침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연고가 없는 곳에 둥지를 튼 여자로 나와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까워진 우리는 평범한 날들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의 작업실에서 그는 작업하고 나는 그날 또는 다음날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할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가끔은 비슷한 직업을 가진 남편 얘기, 비슷한 환경인 시댁 얘기를 나누면서 보내기도  했고, 때로는 그의 작업실에 오신 그의 어머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 시대의 이야기들을 엿듣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본인의 손색없는 미모와 함께 남부러울 것 없는 직업을 가진 남편이 있었고, 또 이제는 다 성장해서 미국과 한국에서 소위 잘 나가는 아들 둘과 딸을 둔 분이셨지만, 직접 본인의 힘으로 많은 것을 일구어 내신 여장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분이셨다. 그래서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얘기들은 내겐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들이었고, 흥미로웠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공유하던 그 친구가 늘 만지고 깎고 있었던 작품은 한 여자의 흉상이었다. 여자의 가슴 언저리부터 머리까지. 한명은 아니고, 각기 다른 얼굴의 세명 정도를 만든다고 했다. 내가 가끔 

“다 된거 아니야?” 

하고 물으면, 그는 

“나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하곤 했다. 나는 다 비슷해 보여서, 사실 뭐가 다 된 것이고, 뭐가 부족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늘 그렇게 말했다. 

너에 대해서 알게 됐던 날 


그렇게 보낸 한참의 시간들이 지나고, 그는 인사동 어느 곳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전시회에 갔다. 갤러리에는 내가 봤던 그 여자의 흉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하나는 아니고 몇개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응, 여자의 모습이야. 30대 여자의 초상”
 “아 그래? 음. 예쁘다.”

 이 친구를 만나고서야 공예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나는 별달리 할말이 없어 그저, 예쁘다. 라고 답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근데 등 뒤에 빨간 줄들 묶어놓은 것은 뭐야?”
 “아, 코르셋이야. 보통 코르셋은 몸 밖 입지만, 이 코르셋들은 몸 자체에 가슴 뒤에 묶여져 있잖아. 앞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예쁜데, 실상 뒤쪽에 보면 빨간 코르셋이 가슴을 꽉 조이고 있는 것을 표현한거야. 그래서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상은 너무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가슴이 답답한 여자들. 30대 여자들 말이야.”  


그의 대답을 들으니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내 친구가 한동안의 시간동안 매일 만지고 깎고 했던 여자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나는 그녀들의 탄생 과정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 했으면서도, 그 여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제서야 알았다.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너가 우리 집에 오고 난 후


그리고 전시가 끝나고, 그 조각상 중 가장 예쁜 하나가 우리 집에 왔다. 


우리 집 거실 장식장 위에 놓인 그 조각상은 매일 나와, 우리집 식구들과 만난다. 30대 여자의 자화상이라는 그 흉상은 마침 30대인 나와도 닮았던 것일까? 우리집에 들르시는 분들중 어떤 분은 “혹시, 이거 빈이 엄마 조각한거에요?” 하고 묻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자화상’이 우리집에 들어오던 날 나는 아이에게 

“빈아, 이건 엄마 친구야. 석빈이도 석빈이 친구들 많이 있지? 비엔토도 있고, 곰돌이도 있고. 그런 것처럼, 이거는 엄마 친구야, 알았지?”

하고 일러두었었다. 그랬는데, 이제 두돌인 아이는 뭔가가 헷갈려서 그런 것인지, 늘 그 조각상을 보면

 “엄마, 엄마”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젠가부터, 그 조각상이 ‘30대 여자의 자화상’이 아니라 그냥 나의 모습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여자는 그냥 ‘나’였다.그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 그냥 '내'가 되었다. 너는 ‘너’가 아니라 ‘나’였다. 그 조각상을 볼때마다 나는 뭔가 가슴 한켠에 아릿한 감정이 일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아직 아름답구나. 내가 무슨 고통을 받는다 해도, 그래도 나는 그 고통을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을 정도로는 아름답구나.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그 여자가 겪는 코르셋의 고통처럼, 내게도 가슴을 휘감는 코르셋이 둘러 쳐져서 뒤에서 누군가가 그 코르셋을 꽉 잡아 댕기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너가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나와 같은 너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의 아픔을 알고 있는 너가 있어서 다행이고, 너가 있으므로 해서, 어쩌면 아무도 알지 못했을 지도 모를 나의 아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세상에 이야기할 수 있으니, 나는 무척이나 고맙다고 말이다. 

뒤늦게 알게 된 것들


그리고 30대 여자의 자화상이 완성되는 동안 내가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 것인지 깨달았다. 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만들어 지는 그 경이로웠던 순간을 함께 했었다니, 그 자화상이 내게 ‘나’의 모습으로 들어오고 난 후에서야 나는 작품이 완성되던 순간들까지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에  많이 감사했다. 


그 조각상은 내게 하나의 조각상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 나의 첫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탄생 과정을 오롯이 함께 했으면서도, 그 친구가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 까맣게 몰랐던 나는, 그 친구를 이제 나의 마음으로, ‘나’로 접하면서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더불어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혹시나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어떤 것들이라도, 그것이 가진 그 내면의  의미를 알게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 곁에 두고 자주 보고 된다면, 그것은 이미 나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나의  마음속에 훨씬 더 깊숙히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작품을 내 주변에서, 나의 공간에 담아 두고 늘 가까이 할수록 그것은 내게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해 주고, 나의 생각과 영혼에 더 다양한 각도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알게 된 나는 그녀의 탄생의 순간, 나의 자화상이 탄생되던 그 시점에 내가 있을 수 있었던 사실이 무척이나 감격스럽다. 위대한 작품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의  감격스러움은,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켰던 것과 비견될 수 있는 것 아닐까?  내게 그런 일이 주어졌었다니, 살아있음은 언제 어느 순간에 나를 엄청난 감동의 순간으로 몰아넣을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 비록 그때는 모를 지라도 나중에라도 알게될 그런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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