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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전문직이란 무엇인가?

조직의 성장은 나의 성장과 일치하는 것일까?

내가 20대 후반의 한 가운데, 어느 거대 기업에서 그 기업의 숫자를 만지면서, 

“아 내가 강남의 한복판에서 이렇게 삼성의 숫자를 만지고 있다니.”

하면서 감격하고 있을 때쯤 내게는 가까이 지내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씩 자신이 낸 보고서를 들고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사회 전반에 대한 이슈가 얽혀있던 보고서였고, 한번은 그런 보고서를 엮어서 책으로도 발간 했다. 보통 그가 낸 보고서를 보면 앞장과 마지막장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회사의 의견은 이 보고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의 보고서는 신문기사에 인용될 때도 가끔 TV 뉴스에서 한 꼭지로 인용될 때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쓴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뜻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구나.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는 걸까?” 

물론 내가 회사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도 작성자인 내 이름이 붙어있을 때가 있기도 했고, 나는 내 보고서에 대해서 책임을 졌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 내부에 국한 될 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상사의 이름 또는  부서의 이름이 보고서에 적혔고, 회사 내부에서만 활용될 그 보고서가 내 이름을 걸고 세상에 보여질리는 만무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이름으로 세상에 내가 책임질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이름 대신 상사의 이름 회사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가 되어도 그 조직 내에서 내가 내 이름으로 세상에 무언가를 내 놓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늘, 아마 승진을 한다해도 나는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속한 조직이 세상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일하는 존재일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 정말  나의 성장일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파고 들었다. 


나는 아마도 이런 것들을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는 무엇이 될까?” 

하는 고민.

 “이런 시간들을 꾸준히 보내고 나면 당신과 나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그때는 무엇이 되어 우리는 다시 만날까?”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사람


나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남는 것이 싫었다. 아마 내 이름으로 무엇을 하지 못한 다는 것은 내가 아직은 홀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의 반증일 수 있었다. 내가 아직은 그만한 능력이 부족한 것. 그래서 선배들과 회사가 나를 보호하고 감싸 주는 것. 내가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러면 

“나는 그 회사에서 있으면서 언제쯤 홀로 설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아마 그 지점에서부터 나는 퇴사를 결심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전문직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전문직이라는 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것. 내가 스스로 책임질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상사나 조직이 보호해주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욱더 철저히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사람말이다. 

물론 그때 자기 이름으로 보고서를 내던 그 친구가 썼던 보고서도 상사가 피드백을 해주고, 조직에서 검열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서 첨삭 과정을 거친 보고서를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내 보였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홀로서는 연습을 조직해서 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홀로 서는 연습을 하는 것


무릇 범인의 조직 생활이란 이래야 하지 않을 까 생각했다. 홀로 서는 연습을 하는 것. 그래서 그 조직을 떠나서도 살 수 있도록 키워지는 것. 마치 부모가 아이를 키우듯이, 이 아이가 나를 떠나서도, 혹은 내가 세상에 없을 때에도 내 울타리 밖에서도 어떤 일들을 잘 해내고, 무탈하게 자신의 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금 내가 그를 돌보고 키워주는 것. 때로는 지적도 하고, 충고도 하고, 방향도 제시해 주지만, 결국은 그 아이의 이름으로 세상에 우뚝 서게 해주는 것, 그것을 연습시키는 것. 


나는 그런 조직 생활을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많은 경우 한 기업에 소속된 회사원의 모습이란 그렇지 않았다. 회사는 개인을 키워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 물론 어느 조직에서든지, 그 조직의 이름으로 일을 하든, 개인의 이름으로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는 동안 들인 시간이 개인을 성장시키지 않는 것은 아닐테니, 그 시간들을 어떤 식으로 요리하는 가는, 이 또한 개인의 역량일 것이다. 


나의 성장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자신이 이름으로 설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래도 나는 조금 아쉬웠다. 물론 평생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 하나 갖지 못하고 사는 세상의 모든 엄마, 주부들이라고 해서 자기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조직안에서 평생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는 개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의 성장을, 너의 성장을 봄으로써 확인해야 할때, 그때의 나는 과연 무엇일까? 타인에게 의존해서 사는 개인은 과연 얼마만큼의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  나의 성장은 과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성장하지 않는 개인은 대체 무엇으로 지속해야하는 생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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