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집중했던 시간들이 내게 남긴 것

여행하지 않는 시간들 까지도,

by 김경옥

사실 얼마전에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뭐, 몇년 정도 여행 안하고 살면 뭐 어때? 난 이제 그런게 별거 아닌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고 살수도 있지 뭐.”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자조섞인 말이라고 치부한다고 해도 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진심이었다. ‘덕분에 돈도 안쓰고 좋지 뭐.’ 하는 생각. 작년에 내게 젖먹이 아이가 한명이었을 때, 그땐 (남편은 바빴어서) 동생을 불러서 동생이랑 아이랑 같이 오키나와에 다녀왔었는데, 올 2월에 젖먹이 아이를 또 한명 출산한 나는 아마도 이번 해에는 비행기 한번 타지 않고 마감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도 있지 뭐. 꼭 여행을 가야하는 건 아니잖아? 라고.


그때 같이 대화하던 친구는

“너가 그럴수 있는 것은, 너가 한참 동안 여행을 즐겼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그건 아마도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이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소위 ‘금단 현상’이라는 것을 낳을 수도 있는 일일테니, 한참 동안 여행에 몰입했던 시간들이 지금 여행을 하지 못하는 시간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정말 그 친구의 말처럼, 그때 내가 여행에 몰입 했던 시간들을 가끔 생각한다. 생각하고, 그런 날들이 있었으니, ‘지금쯤은 여행가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그것들이 지금의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 시간들은 그렇지 않았던 나의 다른 시간들보다 훨씬 더 밀도 깊게 남아서 가끔씩 내 가슴 속에 다시 찾아오는 것을 경험한다.

sticker sticker


내가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느 해에는 한 해에 5번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아니 왕복이면 10번이겠다. 출장이 아니었다. 나는 여행으로 그렇게 다른 곳에를 갔다. 그 한해 말고 그 주변의 다른 해에도 나는 한 해에 두번 정도는 물 밖으로 여행을 떠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어떤 테마를 정해서 어느 여행에서는 위스키만을 맛본다던지, 아니면 우동만을 먹는 다던지, 하기에는, 내 여행은 욕심이 많았다. 때로는 패키지로도 가서 같이 간 사람들과 저녁 술자리를 함께 하기도 하고, 비행기표와 호텔만 예약하고 비행기를 타고 친구와 가서 함께 거리를 걷다가 길을 잘못들어 한참을 고생하기도 하고. 서로

“너가 영어 더 잘하잖아. 너가 말해.”

라고 미루기도 하고. 호텔 비치에서 그냥 하루종일 죽치고 누워 있기도 하고. 같이 간 친구가 소개해 준 잘나가는 현지인을 만나 그 곳 유명한 호텔에서 밥을 얻어먹다가 입에 맞지 않아 비싼 음식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하고.

“여기는 서울의 어디랑 비슷한 것 같아.”

라며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이라도 끌어내어 보기도 하고. 추운 곳을 여행하던 어떤 때는 발이 너무 시려 그 곳에서 신발을 다시 사서 신기도 하고. 씨애틀 어느 식당에서는 너무 큰 고기가 야채도 없이 딱 고기만 나와서 당황하기도 하고. 먹다 뱉기도 하고. 생각보다 호텔이 너무 근사해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나는 테마를 정해 여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여행했던 그곳들은 언제나 내게 새로움과 감탄을 주었었다. 심지어는 그냥 소박하고 평범했던 길과 가게마저도 그저 그곳에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즐거웠던 것들.

sticker sticker

신기한 것은 내가 여행했던 순간들의 주변 시간의 기억들이 이처럼 생생 하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분명히 같은 양의 시간을 보냈고, 일상을 보냈던 그 시간들도 분명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들이었을텐데, 그 시간들의 기억은 내가 여행했던 시간의 기억보다 분명하지 않다는 것. 여행의 시간이 훨씬 더 선명하고, 진하고, 심지어 지금도 기억하면 가끔은 두근거리는 설렘이 있다는 것.


어쩌면 같은 시간을 밀도있게 보낸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든다. 시간의 질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그 시간들에 ‘여행’을 채워넣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이것저것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어쩌면 한줄로 요약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00 회사에 다녔었지.’ 또는 ‘그때의 나는 00와 함께 지냈었지.’ 라고. 몇 줄로 요약되어 버릴 내 귀중한 시절들을 다양한 문구와 다양한 기억과 갖가지 감정으로 소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여행인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삶의 기쁨이기도 했고, 또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삶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는 것.


아 정말 그 친구의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행의 시간이 있었기에, 여행하지 않는 시간들도 버틸수 있는 것인지도.

이전 03화과거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