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 여자의 이야기
평범한 여자
A는 예쁘장하게는 생겼지만, 그렇다고 연예인급으로 예쁜 것은 아니다. A의 아버지는 지방의 한 회사에 재직 중이며 성실하게 일하지만 임원은 아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 충실하지만 그렇다고 다정다감한 남편이나 아빠는 아니다. A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단 인생이 아닌 가족안에서의 이름으로 주부로 아내로 엄마로 평생을 살았고 늘 착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그녀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줄만큼 정겹게 살지도 않았고, 생활력이 엄청 강해서 가족의 경제적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성실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행위 속에 ‘정’이나 ‘사랑’따위는 담지 않았고(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그저 가정안에서 맡은 바 일을 충실하게 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란 A는 다행히 자신에 대해서 (비록 근거는 없더라도) 어찌되었든 자기 자신만큼은 자신을 믿는, 그러니까 자신감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니었고, 학생이라는 신분에 비추어 보면 어마무시한 명문대에 재학 중인것도 아니었다. 그냥 남들에게 얘기하기 창피하지 않을 정도. 그래도 또 어떤 시각으로 다르게 보면 명문대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학교에 다녔다.
너가 예뻐서 좋아
그런 A가 그의 연인 B에게 물었다.
“오빠는 내가 뭐가 좋아? 음. 그러니까 내 어떤 게 좋아서 나를 만나는 거야?”
“응? 글쎄. 난 그냥 너가 예뻐서 좋은데.”
“그래? 히 . 근데 그래도 다른 것도 있지 않아? 내 외모가 내 전부는 아니잖아. 내가 뭐 엄청 연예인 급인것도 아니고. 글고, 내가 내세울게 얼굴밖에 없다는 거야 뭐야? 잘 생각해봐. 다른 건 없어? 뭐. 좋은 성격이라든지, 뭐라든지.”
B는 아주 조금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난 네가 그냥 예뻐서 좋은데. 예쁜거 말고는 딱히 생각이 안나.”
겉으로는
“뭐가 그런게 다 있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
했지만, A는 내심 기뻤다. 내가 예쁘다니. 그것 말고는 모르겠다니. 기뻤다. 그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그래, 원래 좋아하는 데는 따로 이유가 없고, 그러니 모든 좋은 것은 ‘그냥 좋은 것’이고, 그러다 싫어하게 되면, 그때 이유가 생긴다고 했었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그러니, B의 대답은 그런 대답쯤으로 해두자 해도 됐다.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까, 싫어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다시 또 생각해 보면 그 반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것이고, 싫어하는 데에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싶은 것. 그러다 다시 또 생각을 더하면. ‘아니다. 그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싶다.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세상에 그 까닭이 없이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정말 없다면 그것이, 그 까닭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뿐. 이유가 없을리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만약 그 이유가 정말 ‘내가 예뻐서’라면 그것은 다행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외모라는 것은 나를 이루는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이니 말이다. 나의 재능, 나의 식견, 내 영혼의 아름다움, 나의 지성 등 나의 내면과 정신을 이루는 것도 ‘나’ 이지만, 나의 육체를 이루는 것도 분명 ‘나’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나의 배경’을 이루는 나의 직업, 나의 돈, 나의 부모님 등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기에 더 합당한 더 좋은 것이었다. 나의 배경은 바뀔 수 있으나, 본질적인 ‘나’는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나의 배경은, 정말 본질적인 나와는 상관없는 것일까?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하면 이 논리에도 분명 허점은 있었다. ‘나의 배경’은 정말 본질적인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일까? 누군가 나의 배경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인가? (어쨌든 A는 그런 매력적인 배경 따위는 없는, 그러니깐 어마어마한 직업과, 어마어마한 부모님 등은 없는, 그러니깐 (정확하게 말해서) 돈은 없는 사람이므로 이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것이 한편 다행이기도 했다. 나를 좋아 하는 사람은 분명 내 배경이 아닌 나를 좋아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따위 안해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싶지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나의 배경이 훌륭하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매력적으로 비친다면,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일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사람의 본성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그가 이룬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한다고. 그런데 사실 우리가,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때, 만약 그의 배경을 모두 제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슨 재주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의 배경이 그를 모두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그의 배경이 되는 그의 모든 output은 그만큼의 input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훌륭한 부모가 있다는 것은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랄 가능성을 그만큼 높이는 것일테고, 그가 명문대에 다니거나, (사회적으로 볼때)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어릴 때 다른 유혹을 제할수 있는 자제력을 충분히 가지고 충실하게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그저 하늘의 행운이든지 아니면 그의 지난한 노력의 산물이든지, 어쨋든 그것들이 지금의 그를 만드는 데 일조했거나,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터였다.)
더군다나 한 사람이 매일 접하는 일과 공부라는 것은 그의 가치관과 성격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요인 이거늘, 우리는 한 사람이 가진 모든 배경을 제하고나서, 그 사람의 본질과 본성을 대체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배경이 아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 그런데, 세상에 사기꾼들은 또 얼마나 말을 잘하는가? (아, 힘들구나. )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그의 무엇을 ‘판단’해서 사랑한다는 것은 많은 거부감을 낳는다. 그저 그냥 좋으면 안되나? 왜 “‘이래저래서’ 나는 네가 좋아” 라고 해야해? 하는 물음. 그래, 그럼 우리는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를 좋아하는 데에 아무런 까닭이 없는것?
못생긴 나를 사랑할 건가요?
알랭드 보통의 소설, 그의 초기작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 가’에서 클레이는 주인공인 ‘나’에게 묻는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라고.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 네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나의 내면의 재능, 영혼의 아름다움, 나의 우월한 외모에 상관없이 모든 내적 외적의 나와, 나의 모든 배경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
그럼 클레이의 질문처럼 누군가가 나를 나의 외적 또는 내적 모습과 상관없이, 나의 어떤 배경과도 상관없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럴 때의 나는 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그런 나는 알랭드 보통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 간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받는 나는, 아마도 내가 자식이 되고, 누군가가 나의 부모님이 되었을때, 그때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이고, 그때 그들과 나와의 관계일 것.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을 정말 무조건 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부모 자식간이 아닌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사랑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A는 이 문장을 접하고서 예전의 B와의 대화를 생각했다. B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 “내가 예뻐서” 라고 했는데, 만약 클레이의 질문처럼, 내가 못생겨 진다면, 그는 그때도 나를 사랑할까?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연인은 분명 부모와는 다르다. 그리고 부모 또한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부모들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자식을 학대하거나 버리는 부모가 종종 뉴스화 되는 것을 보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우리는 어쩌면 사회적으로 당연히 그렇다고 학습되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를 낳아본 사람들, 대다수의 부모들은 이를 부정할 테지만 말이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정말 자신의 아이가 무조건적으로 예쁘다고 느낀다. 아이가 심지어 못생기게 태어났어도, 그의 부모가 그 아이들을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는 축복같은 일일 것이니,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명제는 당위인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못생긴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그래도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그래도 세상을 살아갈 힘이 생길테니 말이다. 인간이 그래도, 사는 것이 힘들지만,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부모의 무조건 적인 사랑일터였다.
그런데 연인은 부모와는 다르다. 부모도 자식을 무조건 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분명 있는데, 하물며 어떤 연인이 상대를 무조건 적으로 사랑할까? 나를 무조건 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부모의 사랑마저도 아니라면 연인과의 사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인 것이 아닐까? 물론 사랑이 깊어지고 오래되면, 내가 지금의 형체를 잃어가고 말을 잃고 마음을 잃어도 나를 사랑해주는 연인이 있을 수 있겠지. (정말?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마음)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 그 까닭을 아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A는 그 까닭에 대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히 알길이 없어, 그저 이 질문을 가슴에 묻고 지내기로 한다. 잊지 않고 기억하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 그 까닭을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