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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그림책이 필요한 시점

아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우리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 아이가 책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 많은 어린아이를 둔 엄마들의 보편적인 바람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나는 개인적으로도 나 자체가 책을 좋아하기도 해서,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일이 무척이나 기쁘다. 아침이 되면 아이가 나를 먼저 깨운다. 남편이 있을때는 일어나서 남편을 깨우는 일이 나의 첫 일과였는데, 남편이 죽고 나니, 이제는 아이가 먼저 일어나서 나를 깨운다.


“엄마 일어나, 엄마 어서 일어나.”

한참 말을 배우는 내 아이는 아주 불확실하고 귀여운 목소리와 발음으로 나를 깨우고는, 내가 밍기적밍기적 게으름을 피우면 그 자그마한 손과 팔뚝으로 자기가 밤새 옆으로 와 함께 누웠던 내 하얀색 베개와 내 머리 사이로 손을 넣어 나를 일으킨다.

“엄마 얼른 아가한테 가자. 아가한테 가자.”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하다 싶을 수도 있지만, 남편이 살아있을때도 우리는 첫째를 데리고 자고, 둘째는 작은 방에 따로 재웠었다. 19개월 터울이 나는 두 아이를 한방에 재우면 둘이 서로 울어서 서로를 깨울까 두려워서, 그건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둘째를 델꼬 자려니, 첫째는 처음부터 델꼬 자는 버릇을 들여서, 이제 뭔가를 좀 알기 시작하는 첫째가 동생이 태어났다고, 엄마 아빠가 자기 대신 동생을 데리고 자면 너무 큰 상처를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시적으로 원래부터 같이 자던 첫째는 계속 같이 자고, 둘째는 따로 재웠고, 조만간 이사를 가서 방 구조를 달리하면 첫째도 잠자리 독립을 시키리라 계획하고 있었다.


어쨋든 아직도 첫째는 같이 자고, 둘째는 따로 자는데 첫째는 아침마다 나를 깨워서 동생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가자고 한다. 그렇게 우리 둘이 이제 막 돌이 지난 둘째 방으로 가면 둘째도 일어난다. 아니 너무나 순한 우리 둘째는 나와 첫째가 자기 방으로 오기 전에 미리 일어나서 혼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면서 놀고 있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전 작은방에서

“엄마 책 읽어줘요, 책. 책 읽어주세요.”

 했다. 아, 난 실은 아직 너무 졸리고 너무 피곤하다는 말이지. 그래도 아이는 아랑곳 없다. 오빠가 그러니 딸래미도 책을 한권 들고 내게 와서 내 무릎에 앉는다. 요즘 이렇게 둘째가 아장아장 걸어다니면서 한참을 놀다가 갑자기 내 무릎에 와서 스스르 앉기면 ‘아, 어쩜 이 아이는 이렇게나 사랑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갈수록 너무너무 예뻐져서, 커서 너무 미인이 될까봐, 조금은 염려? 스러운 마음은 그저 내가 저 아이의 엄마라서 드는 기우이겠지?


한참 책을 좋아하다가, 집에 있을때면 늘상 티비만 틀어놓고 방치하는 엄마 탓에 맥스터핀스 장난감 병원, 로보카 폴리, 뽀로로, 타요 등에 집착하던 우리 아이는 요즘 갑자기 또 일어나자 마자 책을 찾는다. 가끔 내가, 맨날 애기 책 읽어주기, 애기 티비 보기 등이 싫어서, 내거, 내 책을 좀 보고 싶어서,  거실이 보이는 주방에 앉아서,

“엄마 책 봐야해. 가서 티비 보고 놀아.”

라고 하는 날이면, 아이는

“엄마 내가 책 읽어줄게.”

 하고 내 무릎에 올라와 앉아, 글자만 무수히 적힌, 내 책을 펼친다. 그러고 뭐라고 웅얼웅얼 대다가 그림이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내 책을  다시  덮고는 내 무릎에서 빠져서 내려간다.


우리 아이는 내가

“빈아, 너 혼자 책봐. 알았지?”

 하면, 자기 혼자 그림 책을 펼치고는

 “이거 뭘까요?”
 “사과!” “기린” “코끼리 아저씨”

하곤 하는데, 내 책에는 글자만 있으니.. 어서 글자가 적힌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쳐 줘야 하는 걸까?


 (나는 뭐, 억지로 뭐 시킬 생각은 없다. 특히나 남편이 죽고 없은 후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남편 살아있을때는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켜야지 하고 막 알아보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좀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 잘 하겠지 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 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주도적으로 뭘 막 시키겠다는 생각이 조금 사라졌다는 것뿐. 내 아이들은 내가 옆에서 오롯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잘 할거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뿐.


- 아마 내가 나 사는 거에 더 관심이 생겨서 이지 않을까 싶다. 남편이 죽고 없어져서 가장이 된 내가 느끼는 어깨의 무게가 더 커져서 아이들은 조금 더 방임적으로 키우게 되는 것., 아, 우리 아이들은 어쩌면 이런 일을 계기로 그 전 보다 어쩜 더 자유롭고 훌륭하게 잘 크겠구나. 에헤. - )


근데 아이는 왜 코끼리 에만 아저씨라는 표현을 갖다 붙이는 건지. 아마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라는 노래 때문이겠지? 아, 코끼리 아줌마도 있다고 말해주려다가 이내 말았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때가 되면 다 알게 되는 일이거늘.


그렇게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나는 그림이 있는 것은 아이 책. 그리고 나는 글자만 있는 책을 보는 일이 당연하다는 기존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내 책을 보고 읽지 못해서 그만 두었을때, 내 책에 그림을 넣어서 아이가 가까이 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칠까,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왜 나는 내가 아이방식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요즈음 가끔씩 책에 일러스트들이 많은 책들을 보다보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처음 접했던 것이 그림들인데, 우리에게 세상을 처음으로 소개해 준 것들이 그림들인데, 나는 왜 아이가 내 세계로만 들어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내가 아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다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데 대체 그 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어쩌면 내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으면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그래서 어른에게도 동화가 필요하고, 어른에게도 그림책이 필요한 것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내게로 오기 보다는, 내가 네게 가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함께하고, 함께 커나가는 데 더 쉬운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네게로 가는 일은 또한 내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동화일러스트가 가득한 이야기들을 읽는 것. 나를 위한 그림책을 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네게로 가는, 내가 초심으로 돌아가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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