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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옥 Feb 28. 2018

김작가의 이중생활

아마 나는 꼭 이곳에 갔을 텐데

(지난 가을에 작성했던 글)


얼마 전에 아이 독감예방접종을 맞히러 가는 길이었다. 나야 이제 ‘곧’ 가을이라고 느끼지만, 실상 날씨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남편이 살아있을때, 항상

“얘는 나를 닮아서 더위를 많이 탄다”

고 했던, 조금만 더워서 땀이 나는 아이라서 반팔을 입히고 나왔는데, 바람이 차가운 것을 보니 못내 걱정이 되어 가지고 나온 잠바를 단추를 잠궈서 입혔다. 맨 위 단추까지 잠그려고 하니 아이는 그건 싫다고 한다. 매번 내가 맨 윗 단추 하나쯤은 풀어놓고 옷을 입혀서 그런 것이리라.


아이가 좋아하는 것, 아이가 싫어하는 것들을 접할때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모두 나의 행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깨닫는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못마신다.”

라는 어른들을 말을 항상 새기면서 사는 중.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나의 말과 나의 행동 하나 하나 스스로 철저한 검열을 하는 삶을 살게 하는 요인이었다.


나는 아이가 싫다고 하는 데도,

“빈아, 지금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단추를 모두 잠궈야 돼. 봐? 엄마도 옷 다 잠궜지? 보이지? 그럼 빈이도 할 수 있지?”

하니깐, 그제서야 아이는

“네!”

한다. 단어 하나 하나 말을 하는 그 입술 조차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 아이는 요즘 “네”라는 말을 곧잘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응”이라고 대답했는데, 이제는 “네”라고 한다. 가르쳐서 그런것은 아니고, 그저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이 아이는 ‘응’을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네’를 익힌 것이려니 싶다. 그런데 아이의 말을 듣는 나는 아이가 ‘응’이라고 하는 것보다 ‘네’라고 하는 것이 훨씬 기쁘고 좋다. 왜 그럴까? 나도 모르게 내가 엄마라고, 내가 아이의 윗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요즘은 아이에게 존댓말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 스스로도 아이에게 존댓말을 하는 중이다.  “응”이라는 말보다 “네”를 더 좋아하는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나의 그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렇게 할수록 뭔가 내가 아이에게 나의 권위를 내세우는 일들을 적게 하지 않을까 싶은 것.  나는 너의 의견을 좀 더 존중하는 엄마가 되는 것. 너를 보다 큰 인격체로 대우하는 엄마가 되는 것. 물론 아이의 “응”이라는 말보다 “네”라는 말을 듣고 내가 더 기뻤던 것은 내가 아이보다 윗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서라기 보다, 아이가 드디어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조그만 싹을 본 것에서 나오는 기쁨이 훨씬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게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서 아이 잠바를 입히는 중, 누가 와서 내게 종이 한장을 주었다. 아마 새로 오픈한 가게 인가 보다 했다. 그러고 종이를 봤는데, 나는 그 순간

“와, 한번 가고 싶다 여기.”

 하고 생각했다. 가게 이름은 “김작가의 이중생활”.  

전단지를 보니, 이 가게는 아마도 술집인 듯 했다. 무심코 받은 이 종이를 보고, 나는 예전의 나라면 무조건 이 가게에 갔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아마 가지 못할테지만 말이다.


너와 함께 했던 나의 세월에 나는 술을 그래도 조금은 좋아했던 여자였으니까.  


물론 너를 만나기 전 나의 술에 관한 역사도 조금은 된다. 내가 술을 처음 마셨던 것으로 내게 남아있는 기억은, 아마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여름 가장 친했던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그 친구 집에 캔맥주가 엄청 많이 쌓여있는 것을 봤다. 물어보니 친구 부모님은 주무시기 전에 매일 맥주 한캔씩을 마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럼 우리도 맥주 한캔씩 마셔보자”

고 했다. 그 많은 캔들 중에 한 두개쯤 없어진다고 해야 모르실테고, 또 아신다고 한들 그렇게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깐. 그렇게 둘이 맥주캔을 하나씩 따서 마셨는데, 시원하고 맛있을 것만 같았던 맥주는 맛이 없었다. 얼마나 썼던지. 대체 이런것을 왜 마실까. 우리는 그 맥주를 모두 변기에 부어버렸다.


그리고 그 여름 우리는 하던 목욕 장난을 마저 했다. 친구네집 욕조에 마주앉아서, 뿅망치와 바구니를 가지고 한사람이 다른 사람 머리를 뽕망치로 치는 것을 다른 한사람이 얼른 머리에 바구니를 씌워 막아내지 못하면 샤워기로 물 세례를 하는 것. 유아기 때나 했던 그 장난을 훌쩍 커버린 그때 했던, 그 엄청 더웠던 여름날 그 친구네집 욕조에서 있었던 우리의 놀이는 벌써 한참이 지나 아줌마가 되어버린 지금도 내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아주 맛없고 쓰기만 했던 맥주, 그리고 교복을 입고 둘이 욕조안에 앉아서 샤워기로 서로 물뿌리면서 놀던 기억.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아이와 술을 마시기로 한 내 선택은 아주 잘한 것이었다. 물론 교복과 욕조에서 했던 그 뿅망치와 바구니, 샤워기 만으로도 내 기억은 충분했겠지만, 그래도 마시지 못하는 술이나마 그것이 있었던 것은, 마치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가수가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던 중의 아름다운 고음과 같은 것. 그러니까 화룡정점. 그리고 잊지 못할 나의 첫 경험.   


그러고 난 다음 나는 고등학교 3학년 기숙사에 있으면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그 사이에 또 술을 마시던 날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기억이 남아있는 두번째는 수능을 100여일 남긴 날, 백일주라는 것을 했던 날이다. 그때 우리 학교의 기숙사는 성적순으로 입사했으므로, 그날 같이 술을 마셨던 친구들은 학교에서 소위 논다고 하는 ‘까진’ 친구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범생에 가까운 아이들. 하지만 그런 아이들에게도 술을 마신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저 조금의 일탈이 뭔가 막힌 숨통을 트이게 했던 시절. 다행히도 이날 마신 술은 중학교때 처음 접했던 맥주 맛 보다는 견딜만 했다. 무슨 종을 마셨는지, 얼마를 마셨는지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아마 이때도 그리 많은 양을 먹지는 못했다는 것. 그래도 내게 술을 마셨던 두번째 기억도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생각해도 이때도 술을 마시기 잘했다는 것.


청소년기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이런 저런 사유로 술을 마셨다. 내 기억에 술을 마셨던 기억이 후회되는 날들은 별로 없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고, 적게 마시지도 않았고. 그저 별 특이사항 없이 평범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첫 회사에 입사하고, 너를 만나고 나서 우리는 자주 술을 마셨다. 너는 핫한 동네에서 노는 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생각에 가끔은 연예인을 본것 같기도 하다. 술을 마시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저기 누구 있는거 봤어?”

하는 말들을 했던 것 같으니까. 물론 촌스럽게 그 자리에 다가가서 “저기 00 맞으시죠?” 어쩌고 하지는 않았다. 연예인이라고 별건가? 뭐. 하는 마음에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니 우리가 그때 그 연예인을 보고 그냥 넘겼던 것은 참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들도 분명히 누군가와 만나고 이야기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일텐데, 자꾸 누가 귀찮게 하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한번은 새로 오픈한 가게에도 갔다.

“어? 저기 뭐지? 간판 예쁘다. 한번 가볼까?”

 우리는 그렇게 간판을 보고, 우리가 앞으로 몇시간을 보낼 장소를 골랐다. 블로그의 후기도 맛집이라는 소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간판이 멋져서, 여기 예뻐보여서 그런 이유가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었다. ‘게을러서’ 라는 변명은 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낭만이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가는 것. 그저 눈길이 끌리는 대로 가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여행이 되게 했고, 우리가 실제로 떠났던 많은 여행들에서 우리는 일상과 같은 이런 방식으로 여행을 했다. 일상이 여행이고, 여행은 일상같았던 시절.



그렇게 들어가서 한참을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하니, 사장님이 다가와서

“저희 이번주에 새로 오픈했거든요. 이건 저희 오픈 기념 서비스 에요.”

 라고 하시면서 무언가를 주셨다. 불행히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압구정 로데오거리 한복판에서 예쁜 간판을 보고 들어갔더니, 그 와인샵은 새로 오픈한지 일주일도 안되는 따끈따끈 한 집이라는 것이었고, 약간 어두침침한게 분위기도 좋았고, 끈적끈적한 음악도 나오는게 딱 내 스타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땐 뭐가 그렇게도 할말이 많았을까, 한참을 그렇게 와인을 앞에 두고 얘기 하고 있으니, 너는 갑자기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이야.”

라고 했다. 내가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미리 알았음, 무슨 선물이라도 가지고 왔을 텐데. ”

 라고 아쉬워하니, 너는

“미리 말하면 너가 부담스러울까봐 말 안했지”

라고 했었다.  우리가 아직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그 날, 아니 이미 많은 곳을 같이 다니고, 많은 것을 보고 하면서 지냈지만, 우리 사이를 어떤 관계를 규정하는 언어로 이름짓지는 않았던 그때, 너는 너의 생일날 늦은  시각까지 함께 있을 사람으로 나를 선택해 주었고, 우리는 그날 이후 비로소 우리의 관계를 규정짓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연인.



우리가 연인이 된 이후, 우리의 관계는 날로 발전했다. 연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때, 발전했다는 표현은 우스운 것일까? 우리 사이는 더 깊어졌다. 내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너는 내가 다니던 회사 앞으로 왔다. 너의 회사는 강북에 있었고, 나의 회사는 강남에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 자주 만났다. 처음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날이 지나면서 나중에는 주로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페에서든 술집에서는 늘 그 가게가 문을 닫는 시간까지 있었던 마지막 사람들이었던 것은 변한적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카페든 술집이든, 우리가 함께할 공간을 선택할 때, 우리는 늘 간판, 이름 아니면 분위기를 보고 선택했었으니, 아마 그때의 나라면 ‘김작가의 이중생활’에 반드시 한번쯤 들렀을 것이다. 아마

“세상에 지나가다가 전단지 한장을 받았는데, 이름이 ‘김작가의 이중생활’인거 있지? 왠지 멋있을 거 같아.우리 한번 가보자 . 응?”

 했겠지. 아니면 너가 먼저 내게 이런 곳이 있으니, 한번 가볼래? 했을 지도 모르고. 그리고 우리는 아마 그 곳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또 그 집에서도,

“저기. 저희 오늘 영업 끝났는데요”

 하는 시간까지 있었겠지.


지금 나는 아직 많이 어린 아이 둘이 같이 있어서, 아무데도 못가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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