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그리움
여장부 남여사
12월 16일 흐린 날씨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20년 전 엄마는 예순의 나이에 위암 진단을 받았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은 나의 온 세상이 무너지는 전화였다. '엄마 암 이래'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머리가 멍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 엄마가' 나는 엄마가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 우리 엄마는 여장부였는데, 웬만한 일에는 끄떡없는 사람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엄마는 똑똑했다.
뭐든 잘 해냈다. 우리 집은 식당을 하고 있어서 엄마는
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 많은 엄마였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엄마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마음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절대로 아닐 거야 하면서 그날밤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고, 오진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나도 그랬다. 분명 잘못된 오진이라고 다시 검사해 보자며 검사를 받았지만 위암 말기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진단을 받았었다. (엄마는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모르게 했었다)
우리 집 '든든한 여장부 남여사'는 우리 엄마의 별명이다. 엄마는 나의 기둥이자 태양이었다. 엄마는 우리 자식들을 정말 많이 사랑했다. 우리 모두는 엄마를 많이 의지했고, 엄마를 사랑했고, 언제나 그 자리에 늘 거기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한편으로 자주 싸우시는 부모의 싸움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두렵게 했던 무서움의 소리였다. 부모님의 싸움 소리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소리 속에서 나는 우리 집은 불행이라는 감정을 묻고 또 묻었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뜨는 아침이 되면 우리 집은 언제 그랬냐는둣이 조용하다. 우리는 일어나 발소리를 죽여가며 행여 아빠가 깨실까 봐 밥을 먹지도 못하고 급히 학교를 향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땐 모든 세상이 다 슬펐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미안해했고 학교를 다녀오면 아빠 몰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며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주셨다.
이제 33살인데
엄마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 엄마를 간병하면서 수많은 좌절과 슬픔을 너무 많이 겪었었다. 그때 내 나이 33살이었다. 평생 내 곁에 계실 거라 흔들리지 않는 나의 믿음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다. 나는 어찌할 줄 몰랐었다. 밤마다 교회 차디찬 바닥에 긴 방석을 깔고 밤새 울었다. '하나님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 엄마 없으면 전 못 살아요. 어떻게 이러세요. 우리 엄마 이제 60살인데 왜 데려가시려고 하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나는 밤마다 울부짖었다. 엄마는 항암과 방사선으로 점점 기력을 잃었다. 기억력도 기운도 모두 땅속으로 꺼져 버린 듯 꼿꼿이 앉아 계시던 엄마는 자리에 누웠고, 수북했던 까만 머리칼은 하루가 다르게 한 움큼씩 빠졌다.
어느 날 미용실 가자는 엄마의 말에 함께 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었다. 머리카락을 빡빡 민 엄마는 준비해 온 털모자를 썼다. 나는 뒤돌아서서 눈물을 삼켰다. 엄마는 그 뒤로 입원을 하고 그 후로 몇 개월을 일어나지 못하고 마약성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당당했던 우리 남 여사가 하루하루 말없이 딸의 손길 속에 점점 이별을 준비하는 듯했다. 어느 날 의사는 서울에서는 더 이상 치료할 것이 없다고 이제는 고향으로 가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이야기했다. 때마침 겨울방학이라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두 아이들은 남편이 보기로 하고 엄마를 마산으로 모시고 갔다. 엄마에 몸은 뼈에까지 암세포가 전이가 되어 있었다. 말 한마디 없었고, 간혹 의식이 돌아오면 그건 마약성 진통제의 힘을 빌려 잠시 옛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던 노래를 했고, 어느 날은 자신의 변을 만져서 가지고 놀기도 했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슬픔이었다. 좌절이었다. 살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의 끈을 신께서 하나씩 잘라버리는 듯했었다. 절망만이 남아 있는 6인실에서 나는 성경을 읽으면 좁은 문틈 사이에 한 줄기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엄마는 점점 더 말라갔었고, 의식도 계속 흐려졌다.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이 되니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했다. 우선 엄마가 해보지 못한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엄마는 잠잘 때 잠옷을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다. 늦은 밤까지 장사를 하고 새벽에 다시 일찍 나가야 했으니 잠옷보다는 축 늘어진 옷이 전부였다. 예쁜 양말을 신었던걸 본 적이 없다. 화장품도 별로 없다. 립스틱은 붓으로 바르며 립스틱이 구멍이 날 정도로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발랐었다. 좋은 이불도 못 덮었다. 하나둘씩 엄마가 못 해본 걸 적었더니 몇 가지의 버킷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엄마를 공주로 모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마트에 가서 예쁜 꽃 잠옷과 꽃무늬 양말을 샀다. 그리고 가볍고 따뜻한 이불도 하나 샀다.
간호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어서 엄마는 예쁜 잠옷과 예쁜 양말에 따뜻한 이불을 덮으셨다. 하루하루가 나는 급했다. 엄마의 아침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세수를 하고, 향기 좋은 크림을 발라서 얼굴 마사지를 했다. 의식이 거의 없는 엄마였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를 매일 만나고 있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발도 씻어 드리고 크림을 듬뿍 발라서 부드러운 발에 예쁜 양말을 신겨 드렸다. 엄마는 병실에서 가장 예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였다. 추운 겨울 12월이 지나고 새해 1월이 되고 구정 이틀 전 어느 날 혈압을 재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내 심장은 쿵! 하고 떨어졌다. 곧이어 의사가 오고 눈에 불빛을 비추고 잠시 보호자를 밖으로 불러냈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엄마를 처치실에 모셨다. 가족을 부르라고 한다. 떨리는 손을 움켜잡고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와 동생들에게도 전화를 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평소 30,40분이면 오는 거리를 2시간이 넘게 오지 않고 있다. 엄마는 그 사이 세상과의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나의 외침에도 엄마는 내 품에 안겨서 그렇게 이별을 하고 하늘로 떠나 버렸다. 엉엉 울었다. 엄마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지금 아니라고 좀 더 있으라고 소리치며 울었었다. 매정한 엄마, 매정한 남녀 사는 가버렸다. 시간이 좀 지나니 아빠와 가족들이 처치 실로 들어왔다. 모두 모여 눈물로 이별을 하고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엄마는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24년이 흘렀다.
떠나버린 엄마가 정말 미웠다. 내 나이 이제 겨우 33살인데, 뭐가 그리 급해서 가버렸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도 이제 60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후로 나는 엄마의 이별에 그때의 장면과 날짜를 잊어버렸다. 엄마가 가신 날짜가 정확하게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구정 이틀 전이라는 것밖에... 그날의 충격인 것 같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날짜를 몰라서 동생에게 매번 묻고 있다. 그러고 나서 또 잊어버린다. 아직도 난 엄마를 잊지 못하고 있다. 세월이 24년이 지났다. 잊고 살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도 내가 보고 싶지 않았는지 24년의 세월 동안 고작 2번인가 내 꿈에 찾아오셨다. 야박한 남여사. 오늘 갑자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흐린 하늘이 엄마와 이별한 그날의 날씨처럼 느껴진 걸까. 출근길 엄마를 생각했다. 그리고 퇴근 후 책상에 앉아서 엄마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이 있다. 왜 그렇게 빨리 갔을까? 자식 4명의 눈앞에 두고 가고 싶었을까, 하고 싶었던 일들도, 갖고 싶은 것도 있었을 텐데, 억울했을 텐데 그 억울함으로 악착같이 더 살지 왜 빨리 갔을까
우리 엄마는 매일 바쁜 장삿속에 제대로 밥 한 끼 못 먹었는데, 밥 대신 바나나우유를 먹었고, 박카스와 영진 구론산을 물처럼 마셨던 엄마였다. 나는 마트나 약국을 가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리움을 사 오곤 한다. 스트레스가 병을 키운 것 같다. 늘 싸웠던 아빠와 엄마의 신경전에 어디 편히 말하지 못한 억한 감정이 병을 키운 것 같다. 억울하고 힘들었을 엄마의 마음이 이제야 보인다. 이제야. 얼마나 버티며 살았을까, 얼마나 참고 삼켰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한 딸은 20년이 지나 이제야 엄마를 생각합니다. 죄송해요. 엄마.
나는 엄마를 외면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엄마가 내 곁에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엄마를 1년 반 동안 모시고 엄마를 내 품에서 떠나보냈다. 그리고 아빠가 우리 집에 오셨고, 6년의 시간을 하루같이 모시면서 아빠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 마치 엄마에게 있는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짓눌렀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을까.
그리운 엄마, 보고 싶은 엄마,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뻤던 우리 남 여사님. 오늘은 꿈에서 나를 만나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