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끼에 남겨진 얼굴들

수고했어요.

by 도르가


12월 31일


달력의 마지막 장이 느리게 들려지고, 하루가 끝나면 25년은 더 이상 현재가 아니라 기억이고 추억이 된다. 오늘은 거창한 계획보다 밥 한 끼가 먼저 떠올랐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었느냐가 더 또렷해지는 날이다. '밥'이라고 하면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시골집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엌에서는 밥 냄새와 국 끓는 소리가 섞여 나온다. 동그란 밥상 위에는 김이 나는 밥과 국, 몇 가지 반찬이 놓이고 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별별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하루의 말이 사랑으로 피어나는 시간이다. 박완서의 밥상에는 늘 사람이 있다. 가난해도, 불안해도 밥을 함께 먹는 순간만큼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밥은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 느껴진다.


"밥"을 먹는 다는 건 살아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박완서 -


어른이 된다는 건 그 밥상을 떠나 각자의 식탁으로 흩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는 회사 앞 식당에서, 친구와는 약속된 시간에 맛집을 정하고, 이웃과도 소식을 전하며

밥을 먹는다. 우리는 그렇게 바뀐 장소지만 여전히 밥을 먹으며 마음을 나눈다.

회사에서 먹던 점심 한 끼를 떠올려 본다. 일 얘기만 오갔던 자리였지만 누군가의 한숨,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말 없는 숟가락질 속에 각자의 삶이 슬며시 섞여 들어온다. 그 밥 한 끼는 일을 넘어서 서로를

버티게 해준 시간이지 않았을까?

친한 친구와 마주 앉아 먹던 밥 속에는 아이 이야기, 부모 이야기, 몸 여기저기 아프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젊을 때는 하지 않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밥을 먹으며 '그래도 잘하고 있는 거야' ' 얼마나 힘들었니.'라고 말하며 밥 한 끼 덕분에 다음 날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기도 한다.


오늘 25년의 끝자락에서 밥을 먹었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이미 멀어진 사람도 있고, 아직 곁에 있는

사람도 있다. 밥은 배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사람은 말이 없어도 괜찮고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다.

'같이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믿음이 있기에 밥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증거가 된다.


25년 잘 보냈다. 잘 견뎠고, 잘 먹었고, 잘 살아냈다. 이제 다가오는 26년도 또 그렇게 만나려고 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밥 한 끼를 소중히 여기며 사람과의 만남 속에 숨은 진주를 발견해야겠다.

저무는 25년.... 참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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