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오늘하루운동 2화
“한번만 던져주세요, 네?”잠잘 채비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가면 조카들이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조르기 시작한다. 두 녀석 모두 잠들기 직전의 마지막 놀이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잔뜩 기대하는 아이들과 다르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종잇장처럼 가볍던 아기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이제 아동이 되어 체중이 20㎏도 넘는다. 제아무리 힘이 세도 집어 던지기 쉬운 무게가 아니다.
“던져주세요, 고모. 던져주세요!”그러나 나와 유전적인 형질을 나눈 귀여운 얼굴이 돌아가면서 사랑스럽게 보채는데 무슨 수로 거절한단 말인가. 오냐, 던져보자! 허리에 부담이 가지 않게 숨을 참아서 복압을 높인 채로 한명씩 던졌다. 침대 위로 내동댕이쳐질 때마다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한 웃음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힘에 부치거나 말거나 고모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잘못 던져져서 다치지 않을까 두렵지도 않다. 몸이 공중에 뜨는 그 순간에는 정신이 아득하도록 즐겁기만 하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이게 이렇게 즐거울 일인가 싶다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반복했던 놀이는 하나같이 단순하고 유치하기 마련이다. 위로 높이 들어 올려지거나 빠르게 빙글빙글 돌거나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거나.
그런데 이 오래된 기억이 매트 위에서도 재현된다. 그것도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실력 차이로 인해서 내가 아는 어떤 기술도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농락당하는 상황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고양이의 앞발에 굴려지는 쥐나 어린아이 손에 쥐어진 장난감 신세를 상상해보라. 아니면 힘이 센 어른에게 팔다리를 붙잡혀서 마구잡이로 휘둘리며 즐거워하던 기억을 소환하든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너무 쉽게, 그야말로 어린아이 팔목 비틀듯 나를 넘어뜨리고 집어 던지고 심지어 공중에 들어 올리기까지 한다. 성인을 들고 던지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겠지만 주짓수로 훈련된 사람에게 이쯤은 식은 죽 먹기다. 도복의 소매나 라펠(lapel, 깃이 접히는 부분)이라고 불리는 부분을 단단히 붙잡고 상대의 무게중심에 몸을 밀착하면서 상대방이 쓰는 힘을 작용 반작용의 원리로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몸집이 크고 무거운 상대마저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다.
이렇게 주짓수 기술로 다른 사람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된 이유는 슬프게도, 이 가련한 장난감이 어떻게든 굴욕을 면하고자 나름대로 저항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시체처럼 드러누우면 통하지 않을 기술이, 반대 방향으로 피하거나 상대에게서 멀어지려고 하거나 아니면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팀으로써 오히려 더 쉽게 통한다. 공격을 막으려는 몸부림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더 무참하게 농락당하는 셈이다.
주짓수에서는 이렇게 상대를 꼼짝 못 하게 제압하는 기술을 뭉뚱그려서 ‘컨트롤’이라고 칭한다. 수업 중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단어이자 유명한 주짓수 도복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주짓수는 컨트롤을 통해서 마치 수소를 밧줄로 꽁꽁 묶듯 상대의 힘, 움직임, 공격과 방어 의지를 전면적으로 통제한다. 통제로 시작해서 통제로 끝나는 게 주짓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주짓수의 핵심을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통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주짓수 문화는 타인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나는 주짓수를 사랑하지만 가끔은 너무하다 싶은 정도로 타인의 영역을 멋대로 침범하는 주짓수의 통제적인 문화에는 반대한다.일례로 주짓수를 배우는 친구가 자신이 다니는 체육관에서 고지한 수칙을 보여준 적이 있다. 자간이 좁아서 시각적인 피로를 유발하는 문서에는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숙지할 수 없는 수칙이 석장도 넘는 분량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수칙을 하나씩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단어는 미드에서 단골로 등장하곤 하는 그 단어, 바로 ‘통제광’(Control Freak)이다.
물론 주짓수 문화가 통제적인 데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워낙에 신체 접촉이 많은 종목이라서 약간의 무신경함으로도 얼마든지 남을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복이 깨끗하지 않거나 손톱이 너무 길거나 액세서리를 착용하거나 등등. 또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기술을 섣불리 시도해서 상대를 다치게 하는 사고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물처럼 촘촘한 수칙을 만들어도 그 많은 경우의 수를 전부 방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또 수칙을 전부 고지했고 회원들에게 그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경고했으므로 체육관 쪽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태도 또한 일면 무책임하고 방어적이다. 여기에 안전과 무관하게 ‘새로운 삶을 살라’와 같은, 의도를 수긍하기 어려운 수칙이나 계열과 분파를 지나치게 따지고 포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문화도 과도한 통제에서 비롯됐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쯤에서 나는 답해야 한다. 왜 통제 일색인 주짓수에 이처럼 몰입하는가? 주짓수를 잘하고 싶을 뿐 통제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예전에 3년쯤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만남을 결산하는 의미로 ‘서로의 문제점 15가지’를 작성해서 공유한 적이 있었다. ‘지나치게 비판적이다’, ‘지나치게 냉정하다’에 이어서 ‘지나치게 통제한다’가 문제점 3위에 랭크된 걸 보면 나도 누군가에게 통제광이라고 비난받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현대인 대다수는 통제자를 욕망한다. 대중이 열광하는 콘텐츠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보통 나는 통제당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통제하는 힘을 갖길 원한다. 반대로 완벽한 상대에게 통제당하고 순응함으로써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거나. 통제에 관해서 더 알자면 주짓수를 계속 배워야 할 것 같다. 일단 장난감 신세를 면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