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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솔로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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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Sep 16. 2022

등 뒤에서 날 공격한 남자... 살기 위해 반격했더니

[양민영의 한 솔로] 6화 익숙한 거짓과 우연히 마주한 진실


겁이 많은 나는 주짓수를 배우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다치지 말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자기암시가 너무 과했는지, 부상을 걱정하던 내가 되레 사고를 치고 말았다.

매트 위에서의 부상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중요한 건 과실 비율이다. 피해자는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지만 가해자가 되면 말이 달라진다. 나는 털끝도 상하지 않았으면서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 비록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오기 마련이다.

그날 나와 파트너가 된 남성은 서로 얼굴만 익힌 사이였다. 위험의 전조 같은 건 느낄 수 없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내가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나서서 기술을 알려주었다. 그조차도 아주 흔한 일이다.

대부분의 남성 회원은 여성과 파트너가 되면 당연히 남성인 자신이 여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벨트로는 내가 더 상급자라서 그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심하게 지각한 바람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훈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이어지는 첫 번째 스파링은 수업을 함께한 파트너와 짝이 되는 게 보통이다. 그가 나에게 스파링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그와는 스파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는 무척 호전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공격적인 성향 자체가 나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도장에서 매일 하는 스파링조차 타이틀을 걸고 치르는 경기처럼 임하고 평범하게 이기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이기는 걸 더 좋아한다.

사실 초보자끼리의 스파링은 (비록 말은 스파링이지만) 본격적인 대결이 아니라 상대의 수준을 고려해서 합을 맞추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 가깝다. 체격과 실력 차이에 따라서 재량껏 봐주기도 하는 게 암묵적인 룰인데 생각 이상으로 이 룰은 중요하다. 있는 대로 힘을 쓰다가는 다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 수 없다는 오기



과연 듣던 대로 그는 공격적이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한순간에 나는 뒤를 잡히고 말았다.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공격이 들어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손바닥이 아프도록 탭을 치게 될 게 뻔하다. 초보의 굴욕이라면 겪을 대로 겪었지만 굴욕도 굴욕 나름이다. 이렇게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점층적으로 무르익은 오기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상대의 공격이 거세질수록 나도 온 힘을 다해 버텼다. 항복을 받아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인지, 상대의 공격이 더 거세졌다. 지금 돌아보면 둘이서 사이 좋게 부상을 향해 내달린 셈이다.

머릿속 전광판에 '위험! 비상! 탈출!'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오직 백 포지션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 상대의 허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두 다리로 내 몸통을 묶어놓은 채로 공격에 집중하느라 발목을 꼬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꼬인 발목이, 목이 졸리기 직전인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 오직 백 포지션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양민영


풋록(Footlock)이라고 불리는 기술로, 상대의 꼬인 발목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풋록은 뒤에서 공격하는 사람의 발목이 꼬여 있을 때 그 발목을 허벅지 힘으로 꺾는, 관절기의 일종이다.

나야말로 바로 며칠 전 무심결에 발목을 꼬았다가 풋록을 당한 적이 있었다. 별것 아닌 기술 같지만 고통이 엄청났다. 과장을 보태면 발목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실전이 아닌 상황에서 이 기술을 쓰는 건 꼼수라는데 알 게 뭔가? 나는 두 번씩이나 그 꼼수에 당했는데. 게다가 궁지에 몰린 쥐에게 매너를 바랄 일인가?

백 포지션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풋록을 걸었다. 어쩌면 탭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게 나왔다. '으악'하는 비명, 으드득하고 발목 관절이 부러지는 소리와 이상한 촉감. 영원히 놔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몸통을 휘감고 있던 팔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그는 저만치 나가떨어져 뒹굴었다. 스파링은 중단됐고 파트너는 근처의 정형외과로 갔다.

그렇게 나는 매트 위의 전과를 하나 기록했다. 한동안 피해자를 피해 다녔고 동료들에게는 공격적이고 몰상식한 빌런으로 낙인찍혔을 게 분명해서 괴로웠다. 빌런이 무서워서 피해 다니던 내가 빌런이 되다니!


우연히 마주한 진실


지금 이렇게 회상하는 그 일이 큰 죄책감을 안겨준 건 사실이다. 주짓수를 그만두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흘러 무거운 감정의 층을 걷어냈을 때 뜻밖에도 몰랐던 진실과 마주하고 말았다.

보통의 여성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남성의 몸을 향한, 거의 미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서 같은 남성의 힘이나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면 절대로 다칠 리 없다는 믿음이었다. 이는 여자인 나는 남자를 절대 다치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의 근거이기도 했다. 그 믿음이 너무 쉽게 무너진 탓에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는 남자의 몸도 피, 관절, 피부로 이뤄졌다는, 너무나 당연해서 허탈한 진실만 남았다. 남자라면 모두 싸움에 능하고 적어도 나보다는 잘 싸울 줄 알았던 것, 또 여자가 남자를 다치게 하려면 초인적인 힘이나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모두 착각이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고 어떤 책에도 쓰이지 않았던 진실을 나는 얼떨결에 몸으로 깨우쳤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내가 아는 건 남자를 조심하라는 잔소리와 남자의 힘은 여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세뇌로 이뤄진 돌림노래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공격과 방어의 본능, 그걸 끌어낼 잠재력이 있었다니.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무대책의 조심보다 힘을 쓰는 방법과 방어를 배우는 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은가? 세상이 여자를 상대로 다양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우연히 마주한 진실은 평생 내 앞을 가로막았던 거짓의 차단기를 올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의 힘을 믿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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