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영의 한 솔로] 15화 로맨스 포르노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이 작품의 성공 이후에 훨씬 더 가학적인 로맨스가 속속 등장했다 ⓒ 유니버설 픽처스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 소설가, 문화 비평가, 스타일의 아이콘인 조앤 디디온을 좋아한다. 그러나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한 달째 재생과 멈춤을 반복했다. 그런 와중에 6개의 에피소드를 단숨에 몰아서 본 콘텐츠가 있는데 다름 아닌 <수리남>이다. 솔직히 말하면 대작가의 삶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보다 돈, 마약, 살인이 얽힌 서사가 더 재미있었다.
<수리남>을 보고 다른 심각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감상했을 때처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리뷰를 남겼느냐면 천만에. 페미니스트로서 <수리남>을 본 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들에게 이런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일기장에조차 거짓말을 늘어놓는 인간 본연의 이중성 때문이다.
일찍이 <제로 투 원>의 저자이자 페이스북 초기 투자자인 피터 틸은 '위대한 기업은 자연에 관한 비밀이나 사람들에 관한 비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에 관한 비밀'이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에 관한 것, 또는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숨기는 것'을 뜻한다. 속된 말로 '빻았기('추악하다'는 뜻의 비속어) 때문에' 숨기기 바쁜, 사람들의 비밀 속에 엄청난 시장이 존재한다는 거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예시는 넘친다. 양식 있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3세계 아동의 노동력 착취에 반대하지만 나이키는 승승장구하고 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페이스북은 왕국을 건설했다. 또 외모 평가가 부적절하다는 인식이 널러 퍼졌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타인에 관해서 가장 궁금해하는 사실은 '어떻게 생겼느냐'이다.
그렇다면 대학원생과 거물 사업가의 가학적인 로맨스를 다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1억 2500만 부나 팔린 현상은 어떤가?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주목할 법한 사례이다. 게다가 이 작품의 성공 이후에 훨씬 더 가학적인 로맨스가 속속 등장했다.
마피아 보스에게 납치당해서 감금된 채 학대당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 365일>은 속편 제작이 확정됐고 계약 결혼을 소재로 한 구닥다리 로맨스 소설이 원작인 <브리저튼>은 넷플릭스 공개 한 달 만에 8200만 명이 시청하며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쯤 되면 경고등이 켜질 만하지 않은가?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로맨스 포르노'라는 장르에 포함된다. 로맨스 포르노의 정의를 열심히 찾았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정립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 의미를 '전통적으로 여성이 주로 소비하던 로맨스의 장르적인 틀은 유지하되 남성이 소비하던 포르노적인 코드가 (여성의 취향에 맞게) 가미된 장르를 일컫는 용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콘텐츠'라는 이름을 단 모든 미디어에는 자극이 넘친다. 자극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육질 미남의 몸을 성적 대상화한 자극적인 재미가 로맨스 포르노의 성공 원인이라는 분석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대중화로 어느 때보다도 여성들이 각성하고 변화한 지금 로맨스 포르노가 이처럼 흥행하는 모순적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여성들은 왜 연하의 미남을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너는 펫>(일본 만화로 차가운 커리어우먼이 미소년과 동거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고학력 전문직 여성이 아니라 복종하고 학대당하는 여성에게 감정 이입하는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여러 번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한 히트작에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수리남>처럼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는 취향 가운데 로맨스 포르노의 원조 격인 <나인 하프 위크>가 있었다. 작가가 엘리자베스 맥닐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회고록 형식의 이 짤막한 소설은, 주인공과 이름도 없이 '그'라고 불리는 남자가 9주 반 동안 지속했던 가학적인 로맨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의 재미는 단순히 자극에 있지 않다(요즘 콘텐츠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밋밋한 편이다). 그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주도하는 '그'의 방식이 독특하다. 예를 들면 그는 책, 잡지, 신문, 서류 같은 모든 글을 다 읽어주고 요리도 해준다. 화장을 지워주고 머리를 감기고 머리카락을 빗겨준다. 이와 같은 완벽한 보살핌은 완전한 통제와 학대를 위한 사전 작업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말한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나는 독립적이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했지만 밤이 되면 의존적이고 보살핌을 받았다'고. '어떤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고 책임도 없고 선택권도 없는데 그게 좋았다'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동명의 영화가 흥행한 시기가 페미니즘이 휩쓸고 지나간 1980년대 후반이다. 그렇다면 로맨스 포르노를 향한 폭발적인 수요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현대 여성의 피로가 반영된 일종의 반작용이 아닐까?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의 방향키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할 정도로 독립적이지만 세상은 여성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아니, 오히려 여성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자 할수록 세상은 더욱 싸늘하고 불친절하게 돌변한다.
한마디로 여성들은 지쳤다. <너는 펫>처럼 미남을 펫으로 기를 기력마저 소진했다. 이처럼 낮 동안 피곤한 현실을 감내하고 집으로 무사히 귀환한 여성들에게 넷플릭스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주는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넷플릭스에는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이 친구는 비난도, 검열도 모르는 고마운 친구니까. '여성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수동성의 판타지'로 도피하기에 그만이다.
만약 이 허술한 가설이 조금이라도 유효하다면, 페미니즘과 로맨스 포르노의 수요의 모순적인 공존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특히 로맨스 포르노의 상품성을 확인했으니 더욱 기상천외하고 여성 혐오적인 콘텐츠가 넘쳐날 게 예상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로의 견해를 첨언하자면, 여성 대상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이고 제도적인 뒷받침은 미미한 가운데 로맨스 포르노가 흥행하는 현상은 그 자체로 기만적이고 위험하다. 다 차치하고 로맨스 포르노가 왜 자극적일까? 그 이유는 폭력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 겪는 트라우마를 연구한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에서 유추할 수 있다.
'평범한 관계는 학대자와 맺었던 병리적인 애착만큼 강렬함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 저자는 같은 책에서 '여성은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위험에 대한 도전과 저항으로 위험을 감수한다'고 지적하고 '자신을 향한 남성의 적대성이 어느 정도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성별 간의 관계를 실제보다 더 호의적으로 본다'고 했다.
이 짤막한 인용으로도 로맨스 포르노의 위험이 설명된다. 로맨스와 폭력을 구분할 경계가 없다시피한데도 여전히 이런 서사들이 폭력이 아니라 로맨스라 불리는 까닭은, 순전히 '남성의 사랑과 호의'라는 모호하고 허술한 포장지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