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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Nov 18. 2022

옷이 멋져도 수모를 겪을 수 있다니... 처음 알았다

[양민영의 한 솔로] 14-2화 주짓수 도복

▲ 주짓수 도복 두껍고 커다랗고 중성적인 옷에서 경험한 적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른바 '기(gi)'라고 불리는, 도복다운 도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주짓수를 배운 지 일 년쯤 됐을 때였다. 초보 시절엔 도장에서 무료로 나눠준 유도복을 입었는데 지금이라면 그냥 준대도 사양하겠지만 그때는 그 볼품없고 펑퍼짐한 옷이 마음에 들었다. 성별을 나타내는 기호가 없고 남자 옷인지, 여자 옷인지 짐작할 수 있는 요소라고는 사이즈가 전부였다. 두껍고 커다랗고 중성적인 옷에서 경험한 적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도복다운 도복

이전에는 여성용 운동복을 입을 때마다 크고 작은 불편함을 참아야 했다. 스포츠브라나 레깅스는 말할 것도 없고 수영복이나 러닝 팬츠도 여성용일 경우, 원단 수급에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작고 타이트하게 만든다. 당연히 주머니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다. 살갗이 비치거나 등이나 옆구리같이 엉뚱한 곳이 노출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렇게 몸을 보호하기보다 드러내는 데 충실한 옷을 입으면 운동에만 집중하기 어렵다. 반면 도복을 입으면 군살이 튀어나와서 울퉁불퉁하지 않은지, 속옷이 보이는 건 아닌지 신경 쓸 일이 없다. 비록 소매와 바짓단만 걷으면 당장 논에 들어가서 모를 심어도 위화감이 없는 행색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의 정체성이,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는 초보에서 이른바 '고인 물'로 이동했다. '옷이나 사볼까?' 하는 욕망이 고개 드는 시점이 오고 말았다. 그때가 바로 운동복을 살 타이밍이다.


인터넷 쇼핑몰을 열심히 뒤지면서 알게 된 사실은 도복 시장이 생각보다 좁지 않고 종류도 다양하다는 거였다. 좀처럼 뭘 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도복을 입는지 관찰했다. 장식성을 최소화한, 그저 튼튼하고 운동하기에 편한 옷을 좋아하는 실용파가 있는가 하면 센스 있는 패치나 리폼으로 흰색 기에 어떻게든 개성을 부여하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었다.


무심하게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새삼 주짓수 도복이 재미있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도복이 원형이므로 기본적인 모양은 저고리와 바지인데, 거기에 주짓수 종주국인 브라질을 상징하는 채도 높은 녹색, 노란색의 현란한 문양이 박히거나 등에는 난데없이 양팔을 벌리고 비장하게 서 있는 리우의 예수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건 용이나 사쿠라 같은 동양적인 문양의, 놀랍도록 화려한 안감이 옷 속에 숨어 있다가 재킷을 풀어 헤치는 순간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첫 기를 찾아서 헤매던 나는 도복계의 명품이라는 소요롤(shoyoroll)을 접했다. 주짓수 도복의 트렌드를 이끈 상징적인 브랜드라는 사실을 모르고 봐도 눈에 띄게 멋진 로고와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소요롤의 진가는 흰색 기에서 빛을 발한다. 적절한 위치에 깔끔하게 박힌 원형의 로고는 일본인들이 집착하다시피 하는, 섬세하고 강박적인 인장을 연상케 한다. 나중에 소요롤의 창립자가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주짓수, 서핑,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다가 운동복을 만들어서 성공했다는 스토리를 들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쿨함을 끌어 모은 것 같은 그의 삶을 선망했다.


사람들은 어째서 쿨한 걸 귀신같이 알아볼까. 쿨하지 않은 걸 경계하다 못해서 혐오하기 때문일까? 소요롤은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을 때마다 몇 분 내로 전량 매진된다. 어떤 디자인은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그리고 이런 브랜드가 대체로 그렇듯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 나의 첫 기 그럴듯한 기는 이것 하나뿐이다 

 


인생 도복의 굴욕

바로 그때 래시가드로 이름난 스포츠 브랜드 루카(RVCA)와 소요롤이 컬래버레이션한 기가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랐고 나는 이게 나의 첫 기임을 알아차렸다. 몰욕이 솟구치면서 무슨 수를 쓰든 이걸 손에 넣어야 했다. 엄청난 경쟁 속에서 느려터진 손으로 결제까지 해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국내 사이트에서 일찌감치 실패해서 미국 쇼핑몰에서 이른바 직구로 구매하고 골치 아픈 배송 대행 서비스까지 동원해서 자그마치 한 달 만에 기를 손에 넣었다. 다행히 이 까다롭고, 낯설고, 비싸고, 희귀한 옷은 마음에 쏙 들었다. 마치 히어로 수트라도 입은 듯 자신감이 생겼다.


적어도 똑같은 기를 입은 러시아 남자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한국에 잠시 다니러 온 여행객인데 흰색만 허용하는 우리 도장에 검은색 기를 입고 당당하게 나타났다. 주짓수 자매들이 내 것과 똑같은 기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고 친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탈의실로 달려가 도복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하다못해 이제 도복까지 굴욕을 안기다니!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백인이 기를 차려입은 모습은 종종 봐와서 익숙했다. 하지만 금발에 파란 눈동자,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키에 팔등신이 뭔가, 족히 십등신은 될 것 같은, 살아 있는 마네킹이 왜 나와 똑같은 도복을 입고 나타났단 말인가? 왜 나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느라 바쁘고 저 남자는 매트 위를 날아다니는가?


연예인끼리도 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같은 옷 다른 느낌'이라는 문구를 달아가며 비교 분석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 옷은 누구에게 더 찰떡이라는 둥 반드시 우열을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잔인한 사람들…. 비교 분석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부터도 그 러시아 남자를 보면서 '쇼요롤 기를 저렇게 입는 거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뿐인가, 주짓수하는 AI 같은 움직임에 할 말을 잃었다. 옷이 너무 멋져도 수모를 겪을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로도 너무 과분한 기 때문에 어딜 가나 곤란을 겪었다. 내 기를 '중고로도 살 수 없는 레전드, 역대 최고의 컬래버레이션'이라고 칭찬하던 이는 잠깐이라도 기를 벗어두면 그대로 들고 튈 기세였다. 어떻게 된 일이 주짓수 실력보다 기에 관한 칭찬을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도 그럴듯한 기는 이것 하나뿐이어서 가끔 촬영 있을 때마다 같은 옷만 입는 신세다. 


초창기에 쇼요롤을 서포트하던 블랙벨트 존 칼보(John Calvo)는 "멋져 보이면 기분이 좋고 기분이 좋으면 주짓수도 잘된다(When you look good you feel good, and when you feel good you roll good)"고 했다. 언제쯤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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