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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Sep 26. 2022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서평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다룬 책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1984년에 첫 책이 나온 이후,  19개 국의 번역판이 출간되었으며, 영어판 하나가 250만 부나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그만큼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유명 인사들의 칭송을 받는 책임을 알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은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죽음 속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인간 존엄의 위대함을 체험한 이야기를 책 속에서 풀어 넣어 주고 있다.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세 번째 단계는 석방돼 자유를 얻은 후이다.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中)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첫 단계,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다.
두 번째 단계,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말한다.
세 번째 단계,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절박하거나, 힘든 상황에 다다르면 인간은 보통 세 가지 단계를 거치는 거 같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예습도 없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두 아이 모두가 보채거나 울고 아팠을 때, 그러한 힘듦이 한참 지속되어 혼자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을 때 다음과 같은 단계와 유사한 심리였다.

그 외에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생각과 회로가 정지된 채 모든 게 뒤엉켰을 때 자포자기 상태로 위와 같은 단계를 겪는 거 같다.



내면세계를 극대화함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 처를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中)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 中)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中)

현재보다 과거가 화려했던 사람들은 그때를 이야기하며 자신들이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거 같다.

자신의 과거를 추억 삼는 건 좋지만 그때의 나에게 오랜 시간 거기에 머물다 보면, 현실을 외면하며

자괴감이나 자기 비난에 봉착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과거를 돌아보긴 하되, 현재를 직시함으로써 미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한듯하다. 앞날에 대한 한낱 같은 희망이나 목표가 있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라고 했다.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中)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살아야 할 이유 中)

모든 사람은 시련을 겪는다.  시련이란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힘겨운 일이, 또 누군가에겐 별다른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고통을 짊어지는 것,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그 고통을 가진 자만이 해결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릴케가 '시련을 완수한다.'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날에는, 평범한 것들조차 

시련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많은 시련을 마주하고 산다.

그 많은 것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 내어 받아들이고 하나둘씩 해나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여긴다.

때로는 나보다 더 힘듦을 가진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배려심과 동정심을 품고, 누군가는 내 삶은 그나마 나은 거라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나는 그중 어디쯤에 속할까? 전자와 후자 중간쯤 어디에 있는듯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보며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사람들의 심리상태의 변화를 보았다.

절망적인 사람, 운이 좋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 그 와중에도 웃음을 찾는 사람, 희망을 찾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힘듦이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 절망하고 주저앉기만 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벗어나, 앞날만 바라보며 미친 듯 달려왔기에 여기쯤이라도 서있을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자신의 삶이 가장 힘들다고 여기는 이가 있거나 그 어떤 희망도 없다고 느끼는 이가 있다면,

옆에 두고 오래도록 두고 보면 좋은 이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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