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소믈리에를 시작한 이유는 차가 아니었다

차가 아닌, 그 친구들입니다

by 소믈리연
Gemini_Generated_Image_bwaknfbwaknfbwak.png


"어떻게 차를 공부하시게 됐어요?"

"음... 친구가 하면 좋겠다고 해서요."

차를 시작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자주 듣습니다. 그때마다 다소 난감하기도 합니다. ‘커피를 잘 못 마셔서요.’ ‘글 쓰다 보면 차를 더 자주 마시게 돼서요.’ ‘코로나 기간 동안 무료해서 뭐라도 배워보려다가요.’ 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정확한 답변은 이겁니다. 초·중·고·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20년 지기 친구의 권유로 시작했습니다.

"지연아, 티소믈리에라는 직업 알아?"

"그게 뭔데? 와인 소믈리에 같은 거?"

"어. 비슷하긴 한데, 차와 관련된 직업인 것 같더라.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


2019년에 시작된 코로나 시국은 2020년을 지나도 그대로였습니다. 초등학생이 되는 아들 입학식은 온라인으로 치렀고, 수업도 온라인으로 진행됐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는 일주일에 한두 번 등원했습니다. 매주 월요일, 목요일 아침이면 선생님들이 가정 학습용 키트를 보내주셨고요. 몇 달 내에 끝날 것 같던 코로나는 기약 없이 이어졌고, 2020년은 대체 무얼 하며 보냈는지 기억도 흐릿합니다. 그나마 책 쓰기 수업을 들으며 자전적 에세이를 썼고, 첫 번째 책을 출간했다는 것. 그 외에는 뚜렷하게 해 놓은 게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친구가 건넨 이색적인 직업인 티소믈리에. 뭘 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도 이상하게 구미가 당겼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폰을 열어 ‘티소믈리에’를 검색했습니다. 관련 교육기관이 나왔고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와인의 여러 종류를 경험하고 고객에 맞는 와인을 추천해 주는 사람을 '소믈리에'라고 부르듯, 많은 티(TEA)를 테이스팅 하고 그 특징과 배경을 바로 알아 고객에게 티를 소개하는 전문가를 '티소믈리에'라고 한다.

설명만 읽었는데도 희미한 아우라가 보였습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소성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죠. 호텔관광경영 학사, 석사 학위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남편이 운영하는 카페업과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역 캠퍼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당분간 수업이 없나 보다 했습니다. 부산 캠퍼스에 전화를 걸었더니 다음 개강일자를 알려주더군요. 2021년 1월에 개강한다는 말에 곧바로 접수했습니다. 매주 토요일, 다섯 번만 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10주 차 수업을 5회 차로 줄이고 대신 시간을 늘릴 예정이라고요. 장거리를 오가야 하는 제게는 딱이었습니다.

그때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에게 이 계획을 말했습니다.

"언니, 저도 같이 해요! 우리 어머님도 차 좋아하시거든요. 다실도 갖고 있고요. 같이 가요!"

바로 신청서를 작성하고 수강료까지 입금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티소믈리에’라는 세계에 휘둘리듯 발을 들였습니다.

차에 대해선 녹차와 홍차만 알았습니다. 그것도 티백으로 마시는 정도였죠. 보이차도 들어만 봤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했습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수강생분들께도 민망할 정도로 아는 게 없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배우는 것마다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한 톨 한 톨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배웠습니다. 부산과 울산을 오가면서요. 필기와 실기시험도 통과하고 자격증도 받았습니다.


2년 후, 2023년. 그때까지도 저는 뜨뜻미지근하게 차를 마셨습니다. 자격증 딸 때만큼의 열정은 없었고, 배운 내용의 대부분은 잊어버렸습니다. 손이 가는 차만 마시면서요.

그해 1월,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까지 함께 다닌 친구가 강의 요청을 해왔습니다. 지역에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는 관장으로 일하는데, 시니어 수강생을 위해 건강한 차와 관련한 수업을 해달라고요. 못한다고 했습니다. 잘하지도 못하고, 아직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요. 저도 나름 실행파이지만, 더블 파워 실행력 보유자는 그냥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시작으로 여태 배운 차를 다시 공부하고 강의도 해보라고요. 4월에 있을 예정이라 시간도 여유롭다고 덧붙였습니다.

얼떨결에 수락하고 3초 후에 바로 후회했습니다. 그때부터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했던 교재 4권을 다시 펼쳤습니다. 분명 시험도 쳤던 과목인데, 그새 까막눈이 되어 있더군요. 새내기 학생이 된 마냥 한 줄, 한 줄 다시 읽었습니다.

‘이런 것도 있었구나.’ ‘이렇게 외울 게 많다고?’ ‘내가 여기에 왜 밑줄을 그어뒀지?’ 배움이 아닌 가르침을 목적으로 교재를 보니 머릿속에 실타래가 여러 겹으로 엉켰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풀어서 말해야 하지?’ ‘교재 문장을 그대로 쓰면 표절이 되려나?’ 읽으면 읽을수록 해야 할 일이 더 보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차와 관련한 책을 열 권 구입했습니다. 차의 기본과 역사, 찻잎 성분과 과학, 홍차와 보이차의 역사, 인문학, 찻잔에 얽힌 이야기, 세계 차문화, 차를 즐기는 일상 에세이까지.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고 싶었습니다. 중복되는 내용이 나오면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 여겨 따로 적어두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해야 할 강의 목적과 수강생을 떠올리며 2시간짜리 강의 구성을 잡아갔습니다. 필요한 다구도 구입했고요. 받을 강의료보다 3배는 더 썼습니다. 투자라고 생각하면서요.

강의를 시작하기 2주 전, 폐강 통보를 받았습니다. 생각보다 이 주제에 수강생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요. 다행이다 싶은 한편, 아쉽기도 했습니다.


폐강 통보를 받고 며칠 뒤, 스포츠 의류 매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매장 VIP를 대상으로 강의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필요한 다구도 있고 강의안도 준비해 둔 상황이긴 했습니다. 20명 앞에서, 그것도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이 친구 역시 파워급 실행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냥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시작했습니다. 익숙한 공간에서, 친구의 든든한 후원과 응원을 받으면서요.

그날 이후 저는 차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고, 더 깊이 있게 배우고자 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만학도가 되어 차문화경영학과에 편입까지 하면서요.


"친구가 해보면 좋겠다고 해서요."라고 대답하면, 열에 아홉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은인을 두셨네요." "감사한 분이시네요."

맞습니다. 친구가 권유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녹차와 홍차만 알고 티백만 마시고 살았습니다. 친구가 강의를 권하지 않았다면 강사가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얕은 지식으로 알은체하며 살고 있었겠지요.

생각해 보면 모든 시작은 점처럼 작습니다. “너랑 어울릴 것 같아”라는 말 한마디, 토요일마다 오가던 길, 폐강 뒤에 찾아온 다른 자리, 그리고 ‘그냥 해봐’라고 등을 떠밀어준 믿음. 그 점들이 이어져 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선 위를 걷고 있고요. 앞으로도 오래 배우고, 오래 공부하고, 오래 가르치며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차가 아닌, 그 친구들을요.

Gemini_Generated_Image_30845z30845z3084.pn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젯밤, 나는 집 대신 공방에서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