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도의 겨울, 그리고 내 안의 용광로

by 소믈리연

오늘은 2026년 1월 16일. 달력을 보지 않으면 4월이라 해도 믿을 날씨다. 낮 최고 기온 17도, 한겨울 어딘가에서, 봄을 만난 기분이다. 아침에 습관처럼 챙겨 입은 두터운 안타티카 외투가 무거웠다. 흰색 구스 조끼로 갈아입었지만 그마저 더웠다. 집으로 돌아가 후드티에 편한 고무줄 바지로 갈아입으니 살 것 같았다. 오전에만 세 번. 옷을 입었다 벗으며 의도치 않은 패션쇼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다. 날씨로 인해, 출근 전부터 부산스러웠다.


공방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문틈으로 훅 끼쳐오는 한기에 몸이 먼저 반응했지만 오늘은 공기마저 미지근했다. 으레 손이 가던 히터 리모컨을 내려두고 대신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찻장을 훑다가, 평소 “언젠가 마셔야지” 하고 아껴 두었던 틴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러시안 카라반. 중국의 기문 홍차와 우롱차블렌딩에 훈연 향까지 있다. 히터 대신, 스모키 한 차 한 잔이 공방을 데웠다. 다음 주는 시베리아와 맞먹는 추위가 닥쳐온다고 한다. 오늘 날씨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하와 영상을 오가며 같은 1월 안에서 20도의 온도 차가 널뛴다. 이 변덕. 꼭 누구를 닮았다.


그러고 보면 사람 마음도 그렇다. 어떨 때는 차갑고, 어떨 때는 뜨겁다. 그리고 그 변화가 꼭 특별한 사건’때문만은 아니다. 사소한 말투, 눈빛, 반복되는 행동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온도는 급격히 바뀐다.

요즘 내가 그렇다. 사춘기에 입성한 아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의 온도가 달라진다. 용광로를 품고 산다. 의도와 다르게 말도 거칠게 나간다. 이제 고작 14살인 아들에게, 어른처럼 대하지도 못한다. 자꾸 말이 ‘명령’이 된다. 느낌표로 끝나는 문장이 쏟아진다.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한다. 너무 심했나?

‘그러지 말아야지’. 육아서에서 배운 대로, 화내지 않고 권유하는 방식으로 말해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몇 시간 뒤 다시 아들을 만나면, “이렇게 해 볼래?” “이거 해 줄래?” 하고, 부탁처럼 말한다. 잠시나마, 나도 아들도 차분해진다. 문제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30분도 되지 않아 마음속 용광로가 다시 작동한다. 또 뜨거운 게 치솟는다. 아들이 틀린 말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치고 예민해져서. 내가 마음의 온도를 잘못 다루고 있어서.


날씨가 변하면 우리는 거기에 맞는 옷을 꺼내 입고 벗는다. 추우면 겹겹이 껴입고 더우면 가볍게 만든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한 번 끓기 시작하면 옷처럼 벗어 걸어둘 수가 없고, 아까 던진 말은 다시 주울 수도 없다. 오늘 아침,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던 것처럼 마음의 변화도 빠르게 감지하며 조절하고 싶다. 공방에서 히터 대신 러시안 카라반을 고른 것처럼, 나에게도 열을 낮추는 선택지가 필요하다. 다시 추워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말로 반응할지는 정할 수 있으니까. 내 마음의 온도도 결국 내가 통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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