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이 아니라, 내 사람

by 소믈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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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어제와 달리 오늘 날씨는 매서웠다. 묵직하게 가라앉는 몸을 이겨내고 공방으로 나왔다. 식어버린 엔진을 다시 데우듯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아침부터 여기를 지키고 있는 건 내 의지라기보다, 통영에서 가져온 온기 덕분이다.


지금 돌아봐도 202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다. 그해의 나는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가동했다.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면 덜 깬 눈으로 물을 끓였고, 따뜻한 잔을 손에 쥔 채 오늘 일정을 적었다. 5시 50분엔 수영장으로 출발해 6시 10분이면 1미터 50센티미터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몸을 던지는 순간부터 하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덜 말린 머리는 자연바람에 맡긴 채 현관에서 기다리던 첫째를 태웠다. 7시 40분, 아이는 오전 육상훈련 시간에 늦지 않게 등교했다. 돌아오자마자 둘째 등교까지 마무리하면 어느덧 8시 30분. 차 시동을 세 번 걸고 나면 엄마로서의 오전이 끝났다. 오전이 남긴 흔적을 치우고 식탁에 앉았다. 타이머를 맞춰 책을 폈다. 20분 집중, 밑줄 친 문장 하나를 노트에 옮겨 적기, 다시 20분 읽기, 다시 기록. 그렇게 30분 남짓 다른 일을 하다가 노트북을 열었다. 앉은자리에서 한 꼭지를 끝내는 날도 있었지만, 문장 하나에 발목이 잡혀 커서만 깜빡이다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후가 되면 한 시간쯤 눈을 붙이고 다시 엄마로 돌아갔다. 두 아이를 바통 터치하듯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며 하루를 채웠다. 그해 나는 쪼개진 시간을 모아 개인 저서 한 권과 공저 세 권을 완성했다. 하루를 끝까지 태워서 내일로 가져가던 해였다.


숨 막히는 일상에도 숨구멍은 있었다. 왕복 1시간 20분이 걸리던 해산물 가게, <해녀의 꿈>. 친구의 단골집이던 그곳을 가깝지도 않은데 자주 찾아갔다. 최소 주 1회는. 맛도 맛이지만, 싹싹하고 예쁜 따님과 인품 좋은 사장님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다. 손님이 뜸한 날이면 사장님은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거기서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나가 아니라, 그냥 ‘나’로 있을 수 있었다. 1년쯤 지나 어느 날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했고, 우리는 일상으로 흩어졌다. 물리적 거리는 더 멀어졌고, 각자의 하루는 빠듯했다. 생일날이면 안부를 묻는 정도로만. 그래도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지난 주말, 1년 반 만에 다시 만났다. 나, 친구 두 명, 사장님 모녀, 다섯이 통영으로 떠났다. 1박 2일 일정인데 짐만 보면 1주일 여행 같았다. 음식이며 서로 준비한 선물까지 더하니 6인승 차량의 트렁크는 물론 복도와 조수석까지 빼곡했다. 우리는 늘 만나온 사람들처럼 먹고, 웃고, 떠들었다. 끝도 없이 나오는 음식을 나눠 먹고 밤늦도록 못다 한 이야기를 꺼냈다. “시간을 붙잡아, 해를 붙잡아, 달도 붙잡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런 말을 하며 흘러가는 초침을 원망했다. 따님은 레크리에이션이라며 게임도 준비해 왔다. 그러다 서프라이즈라며 선물을 건넸다. 주문 제작했다는 막걸리였다. 병에 붙어있는 스티커에는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연이 언니의 더 사랑스러울 26년을 위하여’라고. 내 얼굴을 알고, 내 시간을 기억하고, 나를 이렇게 다정한 문장으로 축복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게 고마웠을까.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한때 나는 ‘시절 인연’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시절에 따라오고 가는 인연이 자연스럽다고 믿었다. 관계가 멀어지면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정리하며 넘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나의 가장 뜨거웠던 계절을 함께했고, 다시 만난 겨울에도 같은 온도로 내 편이 되어줬다. 한 시절 스쳐 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 삶 어딘가에 뿌리내린 사람들처럼.


다시 월요일. 날씨는 차갑지만, 괜찮다. ‘더 사랑스러울 26년’이라는 문장이 나를 감싸주는 것 같아서. 2023년에 내가 해냈던 하루들을 떠올리니 올해도 다시 해볼 만하겠다 싶다. 무리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때처럼 시간을 쪼개고, 몸을 움직이고, 읽고, 쓰고, 제때 잠들고, 계획한 시간에 일어나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꾸준히. 통영에서 가져온 온기가 식기 전에, 2026년을 다시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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