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남기며 나를 남기는 일

by 소믈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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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하던 무렵,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인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이렇게 오래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글을 쓰면 좋은 점이 많다고들 하죠.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세 가지로 정리해 보려 합니다.


1) 기억이 기록이 됩니다

어제조차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 년 전 오늘은 더 희미하고, 이 년 전 오늘은 거의 백지에 가깝습니다. 가끔 친절한 휴대폰 알고리즘이 몇 년 전 오늘의 기록을 보여 줍니다. 그제야 “아, 작년 오늘 내가 이걸 했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그런데 사진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들 생일이나 아이들 입학처럼 강력한 키워드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기억은 쉽게 흩어집니다.

글로 남기면 사진이 없어도 작년 이맘때 내가 뭘 겪고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답답하기만 했던 문제도, 다시 읽을 땐 이미 해결된 뒤고요.

요즘 저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니던, 그때 그 아이들이 그립습니다. 꿈에도 나타납니다. 예전 글을 읽다 보면 그 시절 장면이 또렷이 살아나기도 하고요.

‘맨날 저 놀이터에서 놀았었는데.’

‘이날은 응급실도 갔었네.’

초등 고학년,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이제 아프면 혼자 병원에 갑니다. 그때의 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습니다.


2) 중립적인 사람이 됩니다

어제 글쓰기 스승님이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노화나 계절의 흐름처럼, 모든 인간관계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요. 좋은 감정만 남아 있는 사이라면 오랜만에 통화해도 반갑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랜만의 통화조차 어색하다고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자랍니다. 서운함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고, 싸움이 나도 한쪽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소통 과정에서 생긴 엇갈림이죠. 하지만 그 순간에는 자기 입장만 보입니다.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속상한지만 들여다보며 상대방 탓만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 감정이 정리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컨트롤하기 힘들었던 마음이 한 글자, 두 글자 적어 내려가며 정제되죠. 붉기만 했던 마음 색도 옅어집니다. 상대의 입장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요.

가끔은 너무 막말을 쏟아낸 글이 민망하기도 합니다. 지우고, 고치고, 덜어내며 내가 너무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나만 아는 화장을 하죠.


3) 이 또한 커리어가 됩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직업은 직업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작가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제야 조금 적응했지만, 솔직히 지금도 민망합니다. 때론 도망가고 싶기도 합니다.

가끔 모르는 사람에게 직업을 소개해야 할 때면 주부, 프리랜서 강사라고 말합니다. 왜 떳떳하지 못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과 제가 일치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작가들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고요. 닮고 싶은 사람들과 같은 호칭으로 불린다는 게, 어쩐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글을 씁니다

“영상 작업할래요, 글 쓸래요?”라고 물으면 저는 단연코 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쓰는 과정에서 감정이 걸러지고,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이 또한 연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글을 쓸 것입니다. 출간 계획이 없어도, 읽는 이가 많지 않아도, 계속 쓰는 삶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이렇게 좋은 습관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건 기록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남기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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