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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Feb 08. 2023

한번쯤은 괜찮은 이탈

'궤도를 벗어났습니다.'


2월 7일 화요일 PM 11:55.

여느 때와 달리 침대가 아닌 식탁에 앉았다. 와인 한 잔을 가지고 노트북을 켰다.

오전수영이 없는 수요일 전날 밤은 금요일밤과 다름이 없다.

저녁시간 때까지만 해도 다음 날 여유로운 새벽시간을 맞이하자 했지만, 

그 마음가짐은 어둠이 점점 짙게 내려앉을수록 점점 더 높게 증발해 버렸다.




화요일은 두 차례의 수업이 있다. 오전에 3시간, 저녁에 2시간.

마무리하고 나면 11시. 피로도가 몰려와 침대로 향해야 하는 발걸음은 늘 냉장고와 거실을 배회한다. 

누우면 이불속에 파묻혀 잠들어버리겠지... 갈 곳을 잃은 두 자아는 30 분동 안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오전 루틴을 이어가기 시작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물론 주말은 제외지만.

현재 나는, 멤버들 개개인이 설정한 루틴을 인증하고 피드백을 해주는 오픈카톡방을 운영 중이다. 

18명의 사람들이 있다. 역할에 부여된 강제성에 이끌려 꾸역꾸역 하는 날도 없지 않다. 

수영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기까지 고민하다가도, 인증을 위해 나서는 날도 많다.


PM 11:10 식탁에 앉았다. 내일 인증할 필사를 미리 해두었다. 반만 적고, 나머지 반은 내일 적자고 하고선 내 글에 내가 취했는지 마지막 줄 까지 다 써버렸다. 뒤이어, 내일 읽을 분량만큼의 독서도 미리 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와인이 있는 공간으로 갔다. 알코올을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와인은 낯설다. 항상 남이 잔에 따라주는 와인만 마셨고, 그들이 어떻게 여는지 구경만 했었다. '시도해 보고, 안되면 자야지.' 했는데, 곁눈질로 보고 배운 게 먹혔는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마시려고 하니 마땅한 잔이 없어 샴페인 잔을 들고 앉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늘 챙겨 보던 채널이 있었다. 유튜브를 열고 <차이 나는 클래스>를 검색했다.

조선의 왕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의 조회수가 150만 회가 넘은 걸 보고 클릭했다.

30분짜리 영상을 보며, 이것만 보고 자야지 했다.

와인과 참치 캔, 그리고 창난젓을 꺼냈다. 누가 봐도 맞지 않는 조합이지만, 곁들일 안주가 없었다.

그마저도 칼로리를 체크한다며 고르고 고른 거다.

영상을 보며 한 잔, 두 잔 마셨다. 친구가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선물해 준 이유가 있었구나.

적당히 텁텁하고 끝맛은 달콤했으며 목 넘김은 부드러웠다. 아기들의 한 모금처럼 조금씩 마셨는데도 양이 줄어들었다. 아쉬웠다. 딱 두 잔만 더 마시자고 했다. 근데 먹을 게 없다...

싱크대 하부장을 열었다. **드림에서 산 라면이 있었다. 다른 라면보다는 건강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봉지 안에 든 라면을 부숴, 반 정도만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1분 30초 후, 따뜻한 라면 땅으로 탄생했고 수프를 솔솔 뿌리니 냄새가 LTE속도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설민석 작가가 읽어주는 <데미안>에 대한 영상을 켰다.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이 많았던 책이라, 영상으로 꼭 보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30여분 정도였다.

언급하는 내용의 책 부분과 이미지가 떠올랐다. 작가와 나의 다른 해석도 있었고, 중간중간에 위트를 추가하는 패널들 덕에 혼자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혼자 마시니 취기가 더 빨리 올라왔다. ' 이 정도면 딱 좋아.' 라며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수요일 새벽 AM 01:30.


눈을 떠보니 7시 반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곰탕을 꺼내 아이들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두 가지의 느낌표가 팝콘처럼 튀어나왔다.

'라면은 먹지 말걸... 아직도 더부룩한 게, 오늘 아침은 굶어야 하잖아.'

'어제 그러고 안 잤으면 아쉬웠을 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곳간을 채워둬야겠어.'

'지난밤 시간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걸'이란 후회가 아닌, 먹은 것과 관련한 느낌표였다.

매일 루틴을 하고 인증을 하며, 스스로에게 쇠사슬을 채웠다.

이러한 장치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4달 가까이 꾸준히 할 수 없었음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잠시 벗어나고 싶다. 게으름도 피우고 싶고 멍하게도 있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송장처럼 누워만 있고 싶다. 그런 날들이 중간중간 끼여있다 해도 큰 그림 안에 내 삶이 달라지는 건 없다. 적어도, 내일은 원래대로 할 거라는 의지의 불씨는 남아있으니 말이다. 

다음 주는 여행으로 인해 두 번의 화요일을 건너뛴다. 마지막 주 화요일. 그날 밤 나는, 궤도를 벗어나 어떤 일탈을 하고 있을까. 자판을 두드리기만 하는데도, 동공이 확장되며 위쪽을 향해 좌우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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