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그녀와 명랑한 캐디가 만났을 때
2월 14일 오전 11:44 분.
간헐적 연습으로 채운 3년. 아직도 골린이인 나는, 치앙마이에서 소위 말하는 '머리'를 올렸다.
열흘간의 여행일정 중 초반 이틀은 라운딩 장소에 가까운 숙소를 예약했다. 아이들을 케어해 줄 수 있는 곳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현지 시각으로 밤 10시 20분에 도착해 숙소에서 잠만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흩어졌다. 세 번째 오는 것이기도 하고, 그 사이 아이들도 많이 자란 터라 엄마 아빠와 다른 스케줄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엄마를 벗어날 좋은 기회라 여기는 듯도했다. 껑충 성장한 아이들 덕분에 한결 마음 편하게 골프장에 도착했고, 캐디에게는 오늘이 첫 라운딩이라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Sorry'를 말하는 나에게, 본인의 허리에 찬 복대를 보여주며 'Sorry'라 답했다. 화기애애하게 시작한 첫 라운딩. 3년째 아이언만 연습하고, 출발 일주일 전 급하게 드라이버와 유틸, 퍼터 개인레슨 받은 게 전부다 보니 그저 해맑았다. 잘 치고 싶다는 욕심은 애당초 없었고, 공을 띄우기만 하자는 욕심이 전부였다. 한국에선 지금의 실력으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고, 있다 해도 얼마나 눈치가 보일까. 남의 나라라는 조건이 마음에 부담을 접고 오로지 '명랑'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몫했다.
역시나, 첫 티샷부터 엉망이었다. 충분히 예상했기에 웃었다. 캐디는 처음부터 스코어카드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쌀쌀했던 오전과 달리, 초침의 속도만큼이나 뜨거운 햇살이 떠올랐다. 어디로 떨어지는지도 모르는 공을 찾아 걷고, 줍고, 다시 카트에 타고 내리고 치고를 반복하다 보니 얼굴이 신비복숭아 색처럼 변해갔다.
전반이 끝나기도 전에 6개의 공을 잃어버렸고, 벙커와 해저드는 피해서 공을 옮겼다. 한국에서 이렇게 했으면 진작 쫓겨났겠지. 옷만 이쁘게 차려입고, 공은 엉망으로 치는 아줌마라고, 누군가가 온라인에 영상으로 퍼 날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습 때는 그렇게 좌측을 향하던 공이, 오늘은 자꾸 우측으로 날아갔다. 어떤 건 구르고, 어떤 건 엄청나게 멀리 갔다. 중간이 없었다. 정말 잘 맞거나, 안 맞거나. 방향도, 각도도, 거리 측정도 미숙하다 보니 캐디가 시키는 대로 했다. 운 좋게도, 11번 홀에서 버디를 했다. 처음에 공이 날아가는 걸 보고 캐디가 '홀인원'을 외쳤다. 초보자가 그럴 리가... '버디'샷을 성공하자, 월드컵 때 역전골을 넣은듯한 기쁨으로 캐디와 거한 포옹을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골프에 빠지는구나!' 느낌표 폭죽의 열기마저 머릿속에 채웠지만, 한증막의 개운함처럼 시원했다. 이동하는 내내 캐디가 주는 간식과 코코넛 밥을 같이 먹고, 투샷을 찍고, 빅 스마일에 호탕한 음성을 싣으며 웃고 즐겼다. 아니, 놀았다고 해야 할까. 라운딩이 끝날 무렵, 캐디가 나와 함께해서 정말 즐겁다고, 다음에도 꼭 와서 자기와 함께 하자고 재차 강조했다. 잘되나 못되나 웃는 모습이 좋고, 해피해 보여서 함께 해피하다고 했다. 'serious'한 사람들도 많은데, 웃고 즐겁게 하다 보니 더워도 즐겁고, 앞팀에 밀려도 지루하지 않았다고 말해줘서, 나도 덕분에 즐겁고 좋은 추억을 쌓았다고 전해주었다.
처음에 골프장에 도착했을 때, 예약해 준 사장님의 실수로 착오가 생겨 그냥 돌아갈까 했었다. 다행히도, 일이 잘 풀려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길로 돌아갔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했다.
잘 이끌어준 캐디 덕분에 3시간 동안 명랑골프를 제대로 '명랑' 하게 즐길 수 있었다. 내 실력만 받쳐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떠랴.
다른 팀에게 피해 주지 않고, 함께하는 이가 즐겁고, 나 자신이 만족하면 된 거지.
열 개 가까운 공을 잃어버렸지만, 첫 '버디'의 추억을 만들어준 나의 첫 라운딩.
오늘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길 바라며, 모두가 잠든 현지시각 새벽 4:49분. 내 글에 마침표를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