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뒤. 공저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빠른 시일 내 매듭을 짓고, 개인 저서에 집중하고자 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공저 프로젝트 하나가 더 추가됐다. 계획에 없던 일에,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설명을 들으며, 안 할 수가 없겠다 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올해가 시작된 지 네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다이어리에는 여러 항목들이 추가됐다.
내가 글을 쓰는 삶에 올라탔다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글을 쓰며 살 줄이야. 서비스 관련 업종을 전공했고, 관련 직종에서만 십여 년을 근무했다. 재 취업도,당연히 같은 분야일 거라 확신하며 살았다. 물론, 더 이상은 몸 쓰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20대 내내, 무릎 통증으로 잠 못 이룰 때도 많았다. 발바닥이 불타는 듯 저릿했고, 양쪽 새끼발가락엔 티눈이 박제되어 있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줄 아는 전부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자 했다. 그러나, 하루 건너 하루도 예측하기 어려운 인생은,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는 직종으로 나를 이끌었다. 십여 년 넘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 빈 종이와 화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5년 전 나는, 그저 두 아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 사교육시장에 덜 의존하고자 했고, 활발한 기질의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고자 했다. 유대인 자녀 교육법이라는 '하브루타' 배움에 뛰어들었다. 여러 명이 함께 있었는고, 그중에 시인으로 등단한 작가도 있었다. 나머지는 나 같은 경력단절 엄마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지금은 '경력단절 주부'라는 공통된 직업으로, 각자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모였다. 배움의 물결은 호수 안에서 잔잔한 파동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자격증 과정 취득을 마치고도 교육공학, 교육심리학, 그림책 연구, 독서모임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공저 기획으로 연결되었다. 책 출간을 제의한 선생님 한 분의 강력한 의지가 불쏘시개가 되었다. 내 삶에 있어 출간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점이라 여겼는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람 마음이 다르다는 말은, 나 같은보통의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나 보다. 출간을 하고 나니 단독 저서에 욕심이 났다.
이것저것 재보지 않고,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 수업에 등록했다. 매주 2-3회씩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쓰고자 했다. 블로그에 비공개로 적었다. 잘 쓰기보다는, 쓰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두어 달 연습 삼아 쓰다 보니, 이제는 초고를 쓸 수 있을 듯했다. 목표는 매일 한 꼭지 쓰기였지만, 이런저런 핑계에 석 달이 걸렸다. 초고가 있으니, 그다음 단계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초고는 머리가 아닌 손이 두드리는 대로 써 내려갔다. 퇴고는 아니었다. 손보다 머리가 움직여야 했다. 생각하고 다듬어야 했다. 몸으로 하는 일만 해온 터라, 머리를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안 하던 일을 하니, 몸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몇 개월 새 흰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자랐고, 이십 년 전 라식수술한 눈은 다시 안경을 찾았다. 책 한 권 쓰고 나면 만신창이가 된다더니, 나 같은 초보 작가는 오죽했을까. 태아를 품듯 열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출간'을 하고 나니, 그 해의 남은 달은 단 두 달 뿐이었다. 출간보다 힘들었던 홍보의 시간. 출간은 종착역이 아닌 환승역이었다. 그것도 단독 승차. 힘겨웠다. 혼자 운전대를 잡아야 했고, 가다 서야를 반복했다. 무엇을 태우고 내려야 할지 몰랐다. '홍보'라는 것을 위해 가리지 않고 다했다. 글을 쓸 때보다 더 심한, 번아웃이 왔다. 온몸이 아팠다. 며칠을 누워있기도 했다. 세상에 빛을 보러 나온 내 책을 보기가 싫었다. 책이 들어있는 상자를 뜯지도 않고 며칠을 내버려 두기도 했다. 다시 안 쓴다는 말은 안 했지만, 당분간은 출간 계획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 후, 넉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집필을 시작했다. 함께 공부하는 모임에서 공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했다. 덜 외롭고, 덜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첫 초고는 2월, 치앙마이 여행지에서 집필했다. 초고를 완성하고 나니, 개인 저서에 다시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유난히 선명하게 내려앉는 주제가 떠올라, 하루라도 빨리 집필하고자 하던 참이었다.
곧이어 시작하겠거니 했는데, 또 다른 공저 프로젝트가 생겼다. 그려둔 밑그림에, 다른 바탕이 더해졌다. 눈을 감고 색을 입혀보았다. 여기저기에 배치도 해보았다. 좌우대칭 구도, 삼각구도처럼 안정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린다면, 제대로 그리고 예쁘게 덧칠하자 결론지었다. 다른 이들이 글 쓰고자 하는 일에 편승한 일이 '업(業)'이 될 줄이야. 어쩌다 올라탄 '글 쓰는 삶'이지만, 정당하게 승차한 ' 글 쓰는 삶'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손끝으로 빈 화면을 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