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믈리연 Dec 19. 2023

내 안에 엄마



“여보세요?”

“집에 애들 먹일 곰탕이랑 돼지고기 사뒀어. 시간 될 때 가지러 와.”

통화를 끊자마자, 냉장고와 냉동실 문을 연다. 공간을 찾아 반찬통 테트리스 한다. 겨우 여분의 공간을 만들어놓고, 친정에 도착한다.

“이봐, 이봐, 또 이만큼 많이 만들었네.”

20리터 종량제 봉투에는 소분한 곰탕 열 봉지와, 한 근 단위로 소 포장된 돼지고기 몇 봉지가 채워져 있다. 그냥 봐도 한 손으로 들기 버겁다. 간 김에 엄마랑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떨고 일어나 신발을 신으려는데 역시나 잠깐 기다리라더니 몇 종류의 밑반찬을 더 담아준다.

옆에서 보는 아빠는 또 한 소리 한다.

“너희 엄마는 손이 어찌나 큰지, 조금씩 하라고 몇십 년을 말해도 안 된다. 안돼.”




뒷좌석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어릴 적 우리 집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상가주택에서 옷 가게를 했다. 우리 집은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했다. 옷 사러 오는 손님, 동네 이웃, 성당 어른들까지. 가게를 운영해야 해서 외출이 힘든 엄마를 배려한 것인지, 엄마 덕분에 아줌마들의 외출 핑곗거리가 생긴 것인지. 우리 집 보온 밥솥은 식당용처럼 컸고, 국을 끓여도 시골 잔칫집처럼 양이 많았다. 옷 가게 앞에 있는 자판기는 손님들의 동전이 아닌,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엄마 동전으로 가득했다.

자랄수록 이런 상황이 싫었다. 집에서 쉬고 싶어도 늘 손님으로 가득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안방을 지나야 내 방이 있는데, 발 디딜 곳이 없어 벽에 붙어 이동하기도 했다.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는가 싶고,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 손님들도 싫었다. 엄마에게 짜증 내면, 사람 사는 방식이라고만 했다. 중학생이 되어 아파트로 이사하며 북적한 생활은 정리가 되었다.


이사한 동네에서 학창 시절과 청춘 시절을 보내고 결혼했다.

두 아이를 낳았는데, 둘 다 에너지가 국보급이다. 직립보행을 잊어버렸는지 매 순간 뛰어다닌다. 집 안에서도 뛰고, 달린다. 둘째를 임신하고부터 1층에서 살았다. 특별히 뛰는데 제약을 두지 않아서인지, 아이들은 정적인 환경에 머무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이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가면 좌불안석이다. 아래층에서 인터폰이 오지 않을까,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뛰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댄다. 초대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두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맘껏 뛰어도 되는 공간. 내 아이도 친구랑 놀고 싶을 텐데, 뛸 수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막을 수만은 없다. 그렇게 우리 집은 점차 동네 꼬마들의 두 번째 놀이터가 되어갔다. 아이들은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이 되었다. 우리 집은 나의 그 시절처럼 북적북적하게 되었다. 꼬마 손님을 넘어 어른 손님들의 아지트도 되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일 손님이 오는데, 안 힘들어?”

“힘들 때도 있지. 그렇지만, 엄마가 이렇게 하니까 너희들이 착하고 안전하게 잘 자랄 수 있는 거야.”

그땐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주변 사람을 대하고, 곳간에 있는 음식을 기꺼이 내어준 엄마의 모습이 나의 무의식에 깊숙이 잠재되었나 보다. 엄마처럼 피곤하게 살지 않겠다고 하던 내가, 당신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걸 보면.

이왕 할 거면, 해야 한다면 나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하려 한다. 기꺼이 내주고, 함께 행복해야지. 당신의 삶의 방식과 철학이 나의 무의식에 이미 파고들었다면, 긍정적이고 좋은 마인드를 장착해 베풀며 살아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운동으로 시작하는 아침의 매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