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서른이 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은 막냇동생과 엄마가 함께 살았지만 막냇동생이 대학에 가고 엄마가 혼자 살기 시작하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가까이 산다고 살갑게 챙기지는 않지만, 멀리 살면서 살갑지 않은 것보단 가까이 살면서 살갑지 않은 게 나으니까.
처음에는 엄마랑 함께 살았다. 1년. 딱 1년 같이 살고 나는 집을 나왔다. 다시는 같이 살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집을 나왔다. 따로 살면서도 한 달에 한번씩은 집에 들렀다. 생활비도 전달해야 하고 어떻게 사는지도 봐야 하니까.
어린 시절 우리집 마룻바닥은 항상 윤이 났었다. 엄마가 매일매일 물걸레로 닦았으니까. 집에 먼지라곤 없었다. 그때 엄마가 20대였다. 젊었고, 힘이 있었다.
따로 살기 시작한 이후로 해가 갈수록 집의 위생상태가 나빠지는 걸 느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거실 TV 앞에 이부자리를 깔고 큰 베개를 몇 개 겹쳐서 거기서 잤다가 일어났다가 앉아서 밥을 먹었다가 다시 눕는 생활을 시작했다. 베개 옆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젤리, 캬라멜, 사탕 같은 것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이부자리 옆에는 밥을 먹고 치우지 않은 채로 놔둔 그릇들이 있었다. 그러려니 했다. 엄마도 몸이 약해지니까 만사가 다 귀찮겠지.
엄마가 돌아가시기 1년 전, 그러니까 투석 시작하고 10년, 하루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니는 왜 3년이 지나도록 엄마보러 안 오노?”
머리가 징처럼 ‘우우우웅’하고 울렸다. 지난 주에 생활비를 건네주고 온 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니 엄마는 횡설수설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치매였다.
그 다음 날, 나는 인터넷에서 뽑은 간단한 치매 검사지를 들고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는 어제 횡설수설했던 것과 다르게 멀쩡해 보였다. 엄마에게 치매 검사라는 얘기는 하지 않고 검사를 해봤다. ‘경도 인지 장애’가 나왔다. 그런데 사실 이날 엄마는 멀쩡해보였다. 100에서 7을 여러 번 빼는 문제에서 엄마가 너무 빠르고 자신있게 오답을 크게 크게 외치는 바람에 ‘경도 인지 장애’가 나왔을 뿐이지 어제 전화로 횡설수설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매가 아니었다. 주의깊게 살펴보니 투석을 하고 오면 기력이 떨어져서인지, 저혈압 때문인지 일시적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엄마는 당시까지도 운전을 계속 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차를 팔고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한다고 권했으나 엄마가 극구 반대해서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엄마 상태는 운전을 하면 안되는 상태라고, 투석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을 하면 사고를 낼 수 있으니 차를 팔고 택시를 타고 다니면 좋겠다고 얘기했지만 엄마는 싫다고 했다. 엄마로서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야 할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호하게 운전하면 안 된다고, 차를 뺏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사고가 안 났으니 망정이지.
이후로도 가끔 엄마가 투석이 끝나고 돌아오면 횡설수설할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동생에게 전화하며 울기도 했지만 그것도 곧 익숙해졌다. 다행히 투석하고 하루만 지나면 다시 멀쩡해지니까.
엄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입원했을 때 엄마는 넋이 나가 있었다. 젊은 시절 ‘내가 학교를 안 나와서 그렇지 공부를 했으면 정말 잘했을 거라’며 똑똑한 머리를 자랑하던 엄마 눈에 총기는 싹 날아가 버렸다. 엄마를 간병하기가 힘들어 의사에게 물었었다. 치매 검사를 해서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옮겨도 괜찮겠냐고. 그때 의사의 한심해하던 표정이 기억난다.
“지금 어머니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어머니 지금 위험한 상탭니다.”
아는데요, 아는데 이 위험한 상태로 1년, 2년을 더 사실 수도 있잖아요. 제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라는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엄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멍해지고, 헛소리를 했을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의 젊은 시절, 20대, 30대 호탕하게 웃던 그때의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사람을 어떤 사람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가 이전의 엄마가 아니게 된 때는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나를 어느 순간까지 나라고 인식할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느 순간까지 나로 인식해줬으면 할까?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모습이 된 나를 다른 사람들이 돌보기를 나는 원하나? 여러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