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신은 이식을 받는 게 좋다. 다행히 다낭신 환자가 신장이식을 받으면 이식을 받은 신장에는 물혹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신장 기능이 나빠져서 신장 수치가 낮아지면 의사가 이식에 관해서 말을 한다. 친인척에게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뇌사자 장기기증 신청을 한다.
엄마가 처음 신장 이식에 관해 의사에게 설명을 들은 건 12년 전쯤이다. 그 당시에는 혈액형이 다른데 장기 이식을 하면 뉴스에 나던 때였다. 혈액형이 다른 사람 간의 장기 이식은 병원에서 권하지 않았고 혈액형이 같은 부모, 자식, 형제 간에 찾아보라고 했다. 엄마는 O형이었다. 가족 중에 혈액형이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가족에게 이식을 받는 건 마음을 접고 뇌사자 장기 이식을 기다렸다.
브로커가 엄마에게 접근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이식 수술을 받는 것인데 1억을 주면 신장 이식 수술을 해준다는 거였다. 엄마가 진료를 받는 의사는 중국에서 이식 수술을 받겠다면 말릴 수는 없지만 권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 장기의 출처와 관련된 인권 문제가 이유였다. 엄마와 나에게는 인권문제보다 돈이 더 중요했다. 우리에게 1억은 사채를 내지 않는 이상 생길 수 없는 돈이었다. 그 기회는 그렇게 강물 지나가듯 흘러가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엄마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혈액형이 다른 사람끼리도 이식을 할 만한 환경이 조성됐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엄마 몸상태가 신장만 이식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상태였다. 엄마는 간에도 물혹이 너무 많아서 간절제를 하든, 신장 이식 수술 후 간 이식 수술을 받든, 한꺼번에 신장, 간 이식 수술을 하든, 뭐든 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이상적인 건 간과 신장을 한꺼번에 받는 거라고 했다.
엄마 생각인지 의사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어차피 다낭신이 있어서 장기 이식에 부적합한데 동생들은 다낭신이 없어서 장기 이식이 가능하다고 말이 나왔다. 둘째 동생은 유전자 검사까지 받았다. 엄마는 둘째 동생, 막냇동생에게 간과 신장을 각각 받고 싶다고 했다. 나는 좀 아득해졌다.
엄마가 그때 나이가 55살 정도. 50대 중반의 환자가 장기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 아름답고 이상적인 가정에서는 이런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환자가 “나는 이 정도 살았으면 됐다, 투석 받으면서 잘 유지해보겠으니 이식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라”하고 말하면, 가족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무슨 말이냐, 앞으로 2,30년은 더 살아야 할 사람이 그런 소리 말아라, 내 콩팥을 주겠다”, “아니다, 아버지보다 딸인 내 콩팥이 낫다, 내 콩팥을 주겠다”, “내가 누나보다 체력이 더 좋으니 내 콩팥이 더 건강할 것이다, 내 콩팥을 주겠다”, “안 받겠다니까 왜들 난리냐”, “당신 보내고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제발 받아라.”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신장 이식 수술을 받고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같으면 좋았겠지만.
장기 이식 수술이 예전과 달리 많이 발전해서 기증 받는 사람의 수명도 더 길어지고, 기증 하는 사람의 부작용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들었다. 부모에게 장기 기증 후 말갛게 웃으며 사진 찍은 자식들의 사진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부모님을 너무 사랑해서 돌아가시게 할 수 없었다는 갸륵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난,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건강에 있어서는 현실적이다 못해 비관적인 사람이다.
막냇동생은 24살 외향적인 성격의 남자. 군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외향적인 남성이 하는 직장생활. 몸에 피로가 가지 않을 리 없다.
둘째동생은 30살 직장생활 중인 여자. 여성이 장기 기증을 해준 이후 임신을 하면 임신중독증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 기증 후 체력 저하도 무시할 수 없다.
엄마가 간과 신장을 이식받고 나면 3년 정도는 조리만 해야 할 것이다. 간과 신장의 기능을 몇 년이나 유지할까? 그리고 혹시, 혹시라도 수술이 잘 안 된다면? 동생들의 배만 가른 꼴이 된다.
수술비도 부담이었다. 엄마는 엄마가 사는 집의 전세금을 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동생들은 착하게도 ‘엄마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라는 반응이었다. 동생들은 준다는데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한테 다낭신을 물려줬다. 다행히 동생들에게는 다낭신이 없는 몸을 물려줬다. 나로서는 너무 귀한 몸이었다. 그런데 굳이 신장을 빼고, 간을 잘라야 하나.
엄마가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만, 사랑만 주었다면, 모르겠다. 그때는 내가 동생들에게 당장 간과 신장을 내놓으라고 염치없이 말했으려나. 우리는 그런 가정이 아니었다. 동생들은 모르겠는데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은 ‘애증’에서 ‘증’에 좀더 무게가 있었다.
엄마는 동생들에게 ‘너희가 장기 기증을 해준다면 정말 고맙다, 내가 정말 잘하겠다, 다 갚겠다’라고 했지만 엄마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장기 기증을 받는다고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닌데.
나는 결국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애들한테서 기증 받지 마. 다행히 다낭신 없는 애들인데. 애들은 자기들 미래가 있잖아. 물려받은 거 하나 없이 그 몸 하나로 열심히 살아야 되는 애들인데 그거 그냥 놔둬”
그날의 다른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울면서 여러 얘기를 한 거 같은데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린 것 같다.
그 이후로 한동안 엄마와 대화하면 엄마는 “빨리 안 죽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말을 하는 분위기와 어투가 중요한데 아픈 몸으로,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정을 담아 “빨리 안 죽어서 미안하다, 흑흑”이 아니라 증오를 담은 눈빛, 경멸 섞은 비꼬는 말투로 “빨리 안 죽어서 미안하다!”였다. 돌아가신 엄마를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좀 미안하다. 미화할 수도 있는 건데……
엄마는 그 일이 있은 후 1년 후에 돌아가셨다. 내가 죽인 게 맞다. 엄마는 정말 절실하게 살고 싶어했는데 엄마 살리기를 내가 반대했다. 이 일을 떠올릴 때면 내가 참 정없고 냉혈한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또 그렇게 엄마한테 말할 거다. 동생들 몸은 놔두라고.
엄마는 참 외로웠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