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두 명을 데리고 산티아고 순례 길을 떠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이들에게도 내게도 너무 힘들 거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들 반대만 하니 슬그머니 오기가 생겼다.
‘설마 그렇게 힘들기만 하겠어?’
순례길이라는 말이 뭔지도 모르는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은 TV나 책에서만 보았던 유럽에 간다고 즐겁기만 한 표정이었다. 40일은 순례 길을 걷고 나머지 30 여 일은 여행을 하기로 한 일정이었다. 나름 내 욕심과 아이들의 소망을 적절하게 분배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즐겁고 멋질까? 아이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며 여행지에서의 우리들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차오르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잠을 설치기까지 하는 나였다. 순례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의 인생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싶었던 내 욕심에 아이들은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스페인 땅으로 끌려 나왔다.
하지만, 어린아이들과 떠난 순례 길의 험난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두꺼운 겨울 침낭과 겨울 옷으로 가득 찬 우리의 배낭은 우리의 어깨를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차가운 겨울 날씨는 흐르는 땀과 더불어 더욱 한기를 느끼게 했다. 힘들고 지친 아이들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나 역시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순례길 이틀 째 결정을 내려야 했다. 걱정했던 것보다도 훨씬 이른 감이 있었지만 이대로 강행할지 아니면 중단하고 다른 계획을 세울지 선택해야 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일우와 혁우를 설득해서 이대로 순례 길을 갔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계획대로 완주한다면 인내심과 체력, 영적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걸어보았지만 겨울의 산티아고 길은 아이들은 물론 내게도 만만치 않았다. 두터운 침낭과 겨울옷들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고 무엇보다 인적이 없는 시기여서 길을 잃거나 갑작스러운 위험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는 것 또한 큰 걱정이었다.
다른 선택지인 순례 길을 가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기대했던 산티아고 순례 길을 완주 못한 나의 아쉬움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예약을 마친 비행기나 숙박시설 등을 변경하는 것은 물론 순례 길로 예정된 기간을 포함한 전 여정의 여행 계획을 전부 새로 짜야만 했다. 게다가 그 예약 중의 몇 개는 환불조차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꽤 많은 금액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입장만 놓고 보았을 때 순례 길 대신에 여행을 하는 일정이 백 퍼센트 옳았다.제법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유럽의 모습을 여유 있게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만 포기하면 될 문제였다.
정확히 이틀 후 나는 산티아고 순례 길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 길이 내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내와 극기 또한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장소와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무엇보다 나는 아이들을 극기 훈련에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준비되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너무 가혹했다.
내가 아이들과 유럽에 간 이유
어릴 적 내게 유럽은 동화 ‘플란더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와 그의 충견 ‘파트라슈’가 살다 슬프게 죽어간 도시였다.
명탐정 ‘셜록 홈스’가 런던 경찰을 도와 범인을 잡고, 괴도 ‘루팡’이 파리 경찰을 신출귀몰하게 따돌리던 그런 공간이었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면 그런 유럽쯤은 멋진 양복에 검은색 007 가방을 들고 백번쯤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어른이 된 나는 대부분의 어른들처럼 바다 건너 유럽은커녕 살고 있는 동네조차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다. 군대와 제도권 교육을 마치는 것만으로도 온갖 진이 빠진 나는 몇 번의 헛손질 끝에야 겨우 생계의 마지막 끈을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보통의 삶의 열차칸에도 간신히 올라탄 나였기에 현실은 소중했고 또 그만큼 치열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보통의 인생이 그러하듯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지. 뭐. 인생 별거 있어?’
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살아지는 대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꽃보다 할배’라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해보고 싶습니까?”
제작진이 출연자 중 한 명인 신구 씨에게 물었다.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어요.”
그의 이야기는 내 머릿속 종을 울렸다. 80가까운 인생을 살아오며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은 그의 대답이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 정도의 경험과 연륜이 쌓인 그에게 미련이 남는 일이라면 내게도 가야 할 의미는 충분했다. 여기서 조금 더 미루면 나 역시 그의 나이에 후회를 하게 될 것이 분명할 거 같았다. 어쩌면 그의 나이까지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직장으로부터 왜 무리한 휴가를 가느냐는 핀잔도 들어야 했다. 주위의 포기가 늘어나는 것과 반대로 나의 바람은 서서히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2013년 나는 중동의 아부다비 공항을 경유하는 유럽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유럽에는 이미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돌아다니며 많은 체험을 하고 있었다. 나 홀로 떠나는 첫 유럽 여행에 목숨까지도 걸겠다는 중년의 비장한 각오는 그들의 밝고 태연한 표정에 민망할 따름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타인의 체험을 그대로 답습하며 쇼핑하듯 경험을 수집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진지한 자세로 온몸으로 부딪히고 고민하며 체험해 가고 있었다.
설레고 외롭고 치열했던 보름가량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서, 내 아이들에게도 이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 청년들처럼 더 일찍 세상을 보았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조금이나마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똬리를 튼 생각은 어느새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고 눈밭을 굴러다니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초, 나는 아이들과 파리 행 비행기에 오르고 말았다. 4년 전 첫 유럽여행에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무심코 했던 상상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버렸다. 두 아들과 함께 한 두 달하고도 이십일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툴고 부족한 아빠
긴 여행기간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유럽의 다양한 모습을 가능한 많이 보여주려고 애썼다. 혼자 힘으로 부족하다고 느낄 때에는 현지 가이드 투어 등을 적극 활용해 아이들이 보다 입체적으로 유럽을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우와 혁우 역시 어른들도 집중하기 힘든 반나절 이상의 지루한 설명들을 끝까지 경청하며 나의 노력에 호응해주었다. 그러나 언어를 비롯한 역사나 지리, 미술, 음악 같은 다양한 공부의 미흡함, 교통을 비롯한 현지 정보 부족, 장기 여행에서 오는 피로는 때때로 여행지의 소중한 장면들을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밖에 없게 했다.
아이들과 세 달 가까이 유럽에 있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미숙한 아빠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더 잦은 실수를 했고 더 많이 짜증을 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여행을 온 걸까?’하는 생각을 하루에 수도 없이 한 날도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여행이 어려운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박물관이나 기차 등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용하는 공공시설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거나 다투는 일을 막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이 정도까지 아니었는데 이국땅에 오니 그 설레고 흥분된 마음과 호기심에 아이들의 장난은 더욱 심해졌다.
수시로 벌어지는 남자아이 둘의 장난과 싸움에서 나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들을 잃어버리거나 아이들이 다치는 상황을 막아야 하는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콧대 높은 유럽인들에게 적어도 매너 없는 한국 가족이라고 손가락질받고 싶지 않은 욕심또한 있었다. 여행이 길어지고 스트레스가 쌓여가면서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점점 고압적이 되어갔다.
'아이들과 사이좋게 다니는 즐겁고 유익한 유럽 역사 여행'
이러한 모토로 시작한 여행은 어느새 설레는 외출에서 피곤한 일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의 설레는 계획과 희망찬 각오는 바닥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였다. 기대에 못 미치고 계획이 틀어질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자책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결국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 끝에 아이들에게 폭언을 한 나는 마침내 폭력까지 휘두르고 말았다. 자괴감과 죄책감에 꺾인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도무지 한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고작 이렇게 하려고 그 많은 돈과 귀중한 시간을 들여 이곳에 온 걸까?’
심한 후회와 자책으로 여행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일어났다. 결국 나는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 아빠가 때려서 정말 미안하다. 사실 지금 너무 힘들구나. 앞으로 남은 시간, 여행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아빠 혼자 힘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아빠의 체면 같은 건 모두 놓아버리고 아이들을 향해 솔직하게 백기를 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내려놓은 빈자리를 아이들이 스스로 채워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형제들은 내 힘든 상황을 확실히 이해한 듯 빨래나 짐 정리 같은 자잘한 일부터 물건 사 오기 같은 어려운 일까지 스스로 해주기 시작했다. 여행 계획 또한 자신들이 가이드북을 찾아가면서 적극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놀라운 수확이었다.
어쩌면 곪아 썩어 버릴 수도 있었던 갈등 상황을 함께 극복해 보는 값진 경험을 한 것이었다. 물론 한창때의 아이들인지라 그 이후로도 장난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보려는 노력과 서로에 대한 깊은 배려는 남은 여행길의 불안함과 무거움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여행을 통해 얻은 것
아프리카 속담에‘혼자는 더 빨리 갈 수 있다. 하지만 둘은 더 멀리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난 여행은 사실 많이 불편했고 많이 더디었다. 하지만 그 불편한 만큼, 혼자서라면 절대 느낄 수 없었던 소중하고 다양한 것들에 공감하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가 얘기한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는 말 역시 때때로 아이들로 인해 지체되고 뒤틀린 일정으로 조바심 내던 내게 많은 위안을 줬다.
여행을 마친 지금, 과연 나와 아이들이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나와 아이들은 또다시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펼쳐질 인생이라는 거친 여정 속에서 가족으로서, 여행의 동료로서 앞으로도 함께 고민하며 배워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