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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Dec 13. 2022

1:2:7의 법칙

이 말은 왜 내게 그다지 위안을 주지 못할까?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 중 1:2:7의 법칙이란 게 있다. 나를 둘러싼 열 명 중 한 명은 나를 좋아하고 두 명은 나를 싫어하며 나머지 일곱 명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존재하는 70퍼센트의 사람들이 내게 무관심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이 일곱 명이 무관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법칙 아닌 법칙은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고 살게 하는데 꽤 많은 용기와 위안을 준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를 싫어하는 20퍼센트의 사람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무관심한 70퍼센트의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좋아하는 1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살아갈 것 같지만, 사실상 우리는 거의 반대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우리를 싫어하는 2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사용하며 살아간다. 그들을 미워하며 저주하고 복수하는데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모한다. 심지어 그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에서 조차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을 아끼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리고 그를 좇아 살아보려고 하지만 막상 실행해보면 그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대체로 우리는 나를 좋아하는 한 명에 집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보다는 그 한 명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 체 오히려 자기를 싫어하는 두 명에게 매달리기 일쑤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생각건대, 우리 인류의 조상들은 오랜 세월 동안 생존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데 골몰하면서 살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는 사자나 호랑이 같이 강하지도 않으며, 치타같이 빠르지도 않고, 뱀과 같이 맹독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기에 다른 동물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주어진 환경의 안전에 대해 항상 의심을 해야 했으며, 의심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높은 확률로 살아남았다.


가령, 동물의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채 가벼운 복장으로 넓은 들판에 나갔던 긍정적인 마인드의 선조들은 쉽사리 사자나 늑대들에게 잡아먹혔을 것이고 일찍이 그들과 한 몸이 되었을 것이다. 의심을 많이 했던 유전자의 소유자일수록 생존 가능성은 높았을 것이고 살아남은 그들은 번식이라는 형태로 후손에게 그러한 의심 많은 유전자를 계속 전달했을 것이다. 의심 많은 유전자를 가진 남자는 의심 많은 유전자를 가진 여자와 결합해 의심 많은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의 유전자는 의심 많은 유전자가 수백만 년 동안 쌓이고 쌓여 결합한 결과물의 총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 않은가?

우리가 싫어하는 것에 집중을 하는 이유가.




최근, 뇌과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나를 싫어한다'는 상황 역시 우리의 현상과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움'으로 작동하며 이것은 우리의 두뇌 중 '투쟁'과 '도피'를 담당하는 편도체를 자극한다. 편도체는 흔히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원초적인 뇌로서 한번 발동하면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을 밀어내고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자극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싸우려고 하거나 도망치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를 싫어하는 2명의 사람에게 관심을 끊지 못한 채, 오히려 집중을 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도록 진화되어 온 것이다. 비록, 그 관심이 호감이 아니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현대인의 정신병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이유 또한 육체적인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유전자의 습관대로 자신을 둘러싼 정보 중 부정적인 정보를 모으고 그것에 집중하는 정신활동의 패턴이 강화된 결과일지도 모를 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화되어 온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지금과 같이 계속 자신을 싫어하는 두 명을 위협으로 느끼며 그들을 저주하며 살아야만 할까?


원시 수렵시대, 위험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무리 중의 하나였다면 그들은 꽤나 위협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신없이 동물을 쫒는 사이 우리의 등 뒤로 화살을 쏠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함께 사냥을 해야 하는 일 따위는 없지 않은가? 기껏해야 재고 수량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든가 외국의 바이어에게 송장을 보내고 컨펌을 받는 일 같은 것을 분담해서 처리하는 일 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잘못을 반복한다면 직장에서의 안정적인 지위에 영향을 줄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당장 생존의 위협까지 주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첫째로는, 우리라는 제품이 우리를 싫어하는 두 명에게 관심을 갖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종의 우리라는 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숙지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큰 쓸모가 없어진 기능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주위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따위의 공연한 자기 비난을 멈출 수가 있다. 이미 나를 포함한 오늘날 인류의 대부분이 부정적으로 생각해 살아남은 사람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둘째로는, 일단 부정적인 정보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되도록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에 집중하고 감사하는 방향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당장에 말처럼 실천하기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부정적인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강화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둘러싼 것들 중 감사한 일 또는 감사할 만한 일을 찾아 적어보는 '감사일기'를 쓰는 것 또한 싫어하는 두 명에게서 멀어지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싫어하는 두 명에게 관심을 안 가게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내 안에서 힘을 갖게 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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