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낯선 땅에서의 신년맞이

by 옥상평상

제주에서 출발하는 4시 35분 비행기를 타고 6시 반 정도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2022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공항은 무척 한산했다. 워낙에 입국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에 잔뜩 겁을 먹고 있던지라 도리어 맥이 빠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신정을 쇠는 일본은 1월 1일과 1월 2일이 연휴인 까닭에 대부분의 상점이 쉰다고 한다던데 아마 그 연휴전날인 것도 영향이 있는 듯싶었다.


미리 등록한 비지트 재팬 웹을 열어 직원에게 큐알코드를 보여주니 별다른 절차 없이 빠르게 방역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동반가족이라고 이야기하자 가족관계증명서도 요구하지 않고 통과를 시켜줬다. 사실, 영문으로 된 가족관계증명서를 챙겨 오지 못해 조금 긴장하고 있던 차였는데 일사천리로 통과가 되니 이번 여행의 예감이 매우 좋았다.


"아빠, 배고파요."


한창때의 녀석들인지라 끼니를 놓치는 법은 절대 없었다. 근처 공항편의점에 들러 음료수 몇 개와 주전부리 과자 몇 개를 샀다. 적당히 먹을 곳을 찾는데 일본사람으로 보이는 부부가 벤치 한편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이 길거리 취식이었다. 코로나 전에는 실내든 야외든 아무렇지 않게 먹었던 것들이 이제는 항상 허용되는 장소인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설령,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마스크를 내리며 먹는 행위는 자연스레 주위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아무튼 일본 사람도 라면까지 먹고 있는데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우리도 벤치 한 곳에 자리를 잡은 후 간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지금부터 다시 1시간 20분가량 하루카 열차를 타고 교토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교토와 간사이 공항을 왕복하는 하루카 열차는 간사이 공항에서 출발해 교토까지 갈 때는 1시간 18분이지만 교토에서 간사이공항으로 올 때는 1시간 24분으로 6분 정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같은 노선의 왕복이면 동일한 시간이 걸려야 정상일 텐데 큰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6분 정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검색을 해봤지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해 간 티켓 교환권을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승차권으로 교환해 하루카 열차에 탑승했다. 열차 내부는 간사이 공항처럼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열차는 여행으로 부푼 가슴의 우리 가족을 태운채 캄캄한 어둠 속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열차는 9시가 넘어서야 교토에 도착했다. 제주에서 떠난 지 4시간 반이 넘은 셈이었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이 밤중에 혹시라도 버스를 잘못 타면 더 낭패일 것 같아 그냥 걸어가 보기로 했다. 구글지도가 알려준 시간이 25분이라 조금만 걸으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구글지도는 애석하게도 우리가 트렁크를 끌고 가야 하는 것을 감안해 주지는 않았다. 조명이 일렁이는 가모가와강을 따라 걷는 길은 제법 낭만적이었지만 트렁크 손잡이를 통해 전해지는 보도블록의 울퉁불퉁함과 커다란 바퀴소음은 그 낭만을 방해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우리는 40분이 넘게 걸려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짐정리를 대충 마치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기온 거리에 나가 신년맞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피곤한 상태였지만 2022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호텔방에서 그냥 보내기는 아쉬웠던지 내 제안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십분 정도 가모가와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니 게이한 기온시조역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역에서 왼쪽은 가와라마치, 오른쪽은 기온거리인데 기온 거리 쪽은 이미 야사카신사의 신년 종소리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와, 사람 진짜 많네요."

"그러게, 지금 우리나라 보신각 종 앞에도 이렇게 많이 모여있을 거야."


길거리 모퉁이에는 몇몇 사람들이 구운 떡을 넣은 일본식 단팥죽인 젠자이를 먹고 있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캔맥주를 마시며 걸어가는 요란스러운 복장의 젊은이들도 보였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중간중간 배치된 경찰의 지시에는 군말 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일본 답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혼란상황 속에서도 줄을 서서 배급품을 받았던 그들이지 않은가?


"5,4,3,2,1"


12시가 임박하자 드디어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외치기 시작했다.


"하피 뉴이아!!"


우리는 낯선 땅의 한가운데에서 지극히 일본 스런 발음의 해피 뉴이어를 들으며 2023년 새해를 맞이했다. 이윽고 고구려계의 도래인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야사카신사로부터 경건하고 묵직한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래전 우리 조상들이 바다를 건너와 고생고생해서 세웠을 건축물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신년을 맞이한다니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새해인사를 했다. 그와 동시에 서울 한복판 보신각종 앞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복을 나눠주고 있을 터였다.


'부디 새해에는 전쟁과 질병으로 인한 모든 고통이 사라지기를...'


모르긴 해도 이 시간에 깨어있는 모든 지구인들은 한마음으로 같은 소원을 빌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https://maps.app.goo.gl/6WmcXEroeYvddkA69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