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신었을 때는 몰랐던 세상

by 옥상평상



토요일 아침이었다.


아빠, 오늘은 학원 숙제 때문에 검도 못 갈 것 같아요. 내일 아침에 갈게요.
어. 그게 오늘 체육관에 검도 유튜버님들 와서 촬영하기로 했잖아. 오늘 가면 안 될까? 재미있을 거야.
아니 내가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일 가겠다는 거잖아요.


갑작스레 큰 아이가 발끈해 오니 황당하면서도 화가 났다.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게 공부잖아요. 공부 때문에 그런 건데 그 정도도 이해 못 해줘요? 검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큰 애의 말이 맞았다. 지금 고1 2학기인 큰 애에게 중요하고 급한 일은 녀석의 꿈인 천체 물리학자가 되기 위한 수험준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났다. 마치 자식의 장래에 당장 뭐가 중요한지조차 모르는 철부지 아빠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그래. 공부도 중요하지. 하지만 검도를 토요일에 하기로 한 것도 약속이잖아. 그리고 넌 오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했고. 그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공부든 뭐든 간에 약속을 못 지키게 됐으면 아빠한테 화를 낼 게 아니라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거 아냐?


아이의 태도를 물고 늘어지는 스스로가 많이 옹색하게 느껴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내일 간다고 했잖아요!



큰 애 역시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집에 있으면 감정이 제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얼른 한라 수목원으로 향했다.


울창한 숲이 만드는 그늘 길을 따라 맨 발로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질 정도로 걷고 나니 시끄러운 생각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비워지며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 남았다. 마음이 편해옴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발바닥으로 통증이 전해졌다. 새끼줄을 가로세로로 이어 만든 포장 길이 끝나고 작은 자갈들이 깔린 붉은 흙바닥이 시작된 것이었다. 자갈 조각들이 마지 지압판의 돌기처럼 발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을 찔러 왔다. 그 통증이 꽤 고통스러웠다. 만약, 신발을 신고 있었다면 전혀 느끼지 못했을 고통이었다. 통증 때문에 발바닥을 조심스레 옮기고 있는데 등으로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갈을 밟지 않기 위해 땅을 보며 걷는데 문득 죽은 지렁이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문득 큰 애에게로 생각이 옮겨졌다.

큰 애도 지금 나처럼 자신만의 길을 맨 발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발을 신고 있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벗겨진 맨 살로 그대로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지 신발을 신고 벗고의 차이만으로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발을 신었을 때는 전혀 느낄 수조차도 없었던 작은 자갈의 촉감들이 신발을 벗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어 피부로 전해진다. 이런 작은 차이로도 그러할진대 우리네 삶의 차이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각자에게 다가올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아마도 삶은 이런 것일 게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 관계가 설령 피를 나눈 부모 자식 관계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맨 발로 걸으며 지금 이 시간 자신 만의 길을 맨 발로 힘겹게 걷고 있을 사춘기 아이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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