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인들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골(gaul)족의 땅이라고 하여 갈리아라고 불렀다. 골족은 고대 유럽지역에 퍼져 살았던 호전적인 유목민족인 켈트족의 일파라고 한다. 로마의 카이사르에 의해 9년 만에 복속당한 갈리아 사람들은 점차 로마에 동화되어 갔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대법원이 있는 시테섬은 이미 이 시기부터 요새로 활용되며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게르만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은 동로마 제국의 승인을 받아 갈리아 지역을 통치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후손이 세운 왕조로 등장한 메로빙거 왕조가 바로 이 프랑크 왕국의 초기 왕조이다. 메로빙거 왕조는 다시 카롤링거 왕조로 이어지고, 샤를마뉴 대제라고도 불리는 카롤링거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받게 된다.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를 성 베드로 성당의 미사에 초청한 후 황금관을 씌워주는 깜짝쇼를 연출했다.
1) 카페 왕조
카롤루스 대제의 죽음으로 카롤링거 왕조는 단절되었고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고 말았다. 그 틈을 타 지금의 파리가 있는 일드프랑스 지역의 백작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세웠다. 분열된 동프랑크 왕국이 신성로마제국으로 강성하는 동안, 서프랑크 지역의 카페 왕조는 존속하기 급급했다. 카페 왕조의 통치 영역은 일드프랑스 지역에 국한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각 지방의 영주들이 통치하였다. 그중 가장 권한이 강했던 것은 지금의 프랑스 북부인 노르망디 공국과 중부인 앙주를 소유한 지금의 영국,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하지만, 카페 왕조의 7번째 왕인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소유한 프랑스의 영토를 프랑스 남서쪽 곡창지대인 아키텐을 제외하고 모두 빼앗고 말았다. 이러한 업적으로 필리페 2세는 후세에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따 '존엄(라틴어로 Augustus) 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 발루아 왕조와 100년 전쟁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은 후 여동생의 아들인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와 사촌 형 제인 필리프 6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나 여성을 상속에서 배제하는 프랑크의 전통에 따라 결국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발루아 왕조의 시작이자 100년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왕위 계승문제와 곡창지대인 아키텐 등을 둘러싼 영토분쟁으로 프랑스와 영국은 100년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국의 수배에 달했던 인구를 가졌던 프랑스는 줄곧 수세에 몰리다가 성녀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가까스로 판세를 뒤집었다. 결국 잉글랜드는 도버해협의 교두보인 칼레만을 남겨두고 철수하고 말았다.
3) 위그노 전쟁과 부르봉 왕조
위그노는 중세 프랑스의 칼뱅 개신교도들을 일컫는다. 이들의 숫자는 적었으나 발루아 왕조에 적대적인 귀족들이 많았다. 위그노 세력은 빠른 속도로 정치 세력화되어 가톨릭 세력과 대립을 일으켰고 여기에 가톨릭 세력의 수장 격인 기즈 공작이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들을 공격하여 8차에 이르는 위그노 전쟁(1562-1598)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톨릭 가문과 위그노 가문의 결혼식이 열리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감행된 가톨릭 세력의 위그노에 대한 학살로 대립은 절정에 이르렀다. 신교에 대해 너그러웠던 앙리 3세가 사망하고, 위그노의 대표 격인 나바르의 왕이 왕위에 오르며 낭트칙령을 공표하였다. 부르봉 왕조의 시초이기도 한 앙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위그노의 신앙을 조건부로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공표하여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다. 위그노 전쟁으로 프랑스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나, '정치파(politique)'라고 하는 종교와 분리된 새로운 정치세력을 등장시켜 프랑스가 절대왕정의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종교적 관용은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이 프랑스의 재정에 기여하게 하였고, 이는 프랑스가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태양왕 루이 14세 시기에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절대 왕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절대왕권에 기여했던 제3신분 '부르주아' 시민계급은 계몽사상에 자극받아 결국 프랑스혁명을 일으켜 왕정으로 대표되는 구체제를 새로운 체제인 공화정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이는 금세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의해 왕정으로 강제 복귀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는 혁명으로 인한 공화정과 왕정복고로 인한 왕정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조카로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 3세는 왕위에 오른 후,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한편, 독일 제국의 통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프랑스가 눈엣 가시였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있던 프로이센은 마침내 보불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수도인 파리 역시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때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의 대가로 넘겨주는 지역이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유명한 '알자스-로렌' 지방이다.
산업혁명의 성공과 식민지에서 거 뒤들인 부로 프랑스는 에펠탑을 건설하고 만국박람회까지 개최하게 되었다. 이로써 다시 한번 좋은 시기를 맞이하는 듯했지만,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는 다시 한번 쑥대밭이 되고 만다.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에서 가까스로 승리하며 파리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4년의 지루하고 고된 전투는 한 세대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프랑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마른 전투에서의 승리에 확신을 얻어서였을까? 방어를 최우선으로 삼은 프랑스 군 수뇌부의 결정에 의해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에는 마지노선이 설치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만리장성이었다. 첨단 무기로 무장된 철옹성과 같은 이곳을 독일군이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우회하는 전략으로 이 견고한 요새를 간단히 무력화시키고 말았다. 독일 전차로 이루어진 기갑부대는 마지노선의 북쪽 지역인 지금의 룩셈부르크가 위치한 아르덴 고원을 가로질러 침입했다. 프랑스 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마지노선의 요새들은 여전히 난공불락이었지만 자신을 피해 우회해서 들어오는 적에게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1차 대전에서 가까스로 자존심을 지켰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결국 함락당하고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세력은 연합군에 가담해 계속 전쟁을 수행했고 훗날 연합군의 승리에 당당히 기여했다. 그 후,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 비용의 지불과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지만, 전쟁 영웅 드골 대통령의 지도력 하에 다시 한번 현재의 강대국의 모습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