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나 몰래 아빠한테 비밀 이야기를 했다. 아무래도 초코바 이야기인 것 같다. 아빠와 형을 감시해야겠다.
철제 침대 난간에 아이들의 속옷 빨래를 널고 있는데 일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빠, 순례길 말고 그냥 여행하면 안 돼요?”
“오늘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죽는 줄 알았어요.”
엄살이 심한 아이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빠, 이렇게 걷기만 하는 거라면 차라리 한국에 돌아가서 걷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일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조금만 더 걸어보면 안 될까?”
“아뇨, 아빠. 힘든 것도 힘든 건데 스페인까지 와서 이렇게 걷기만 하는 건 뭔가 아까운 것 같아요."
일우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달리 적당히 이야기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파리에서처럼 그냥 여행 다니면 안 될까요?"
할 말을 마친 일우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순례길을 계속 이어갈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순례길은 어른인 내게만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순례길의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일은 술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술맛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난감한 일이었다. 사실 이 길의 의미는 나조차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어떤 것이었다. 직접 걸어봐야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결국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저 걷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먼 곳까지 함께 와서 혼자만의 욕심으로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을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하기로 결정했다. 대도시인 팜플로나로 넘어가 그곳에서 아이들과 상의해 결론을 내기로 했다. 게다가 팜플로나 우체국에서는 순례 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우체국까지 우편으로도 짐을 부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였다. 배낭의 무게만 덜 수 있다면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례길도 한 번 해볼 만할 지도 몰랐다.
갑자기 산티아고를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우울해졌다. 이 여행에 내가 걸었던 의미 중 가장 큰 것 하나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무기력하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내일 팜플로나로 넘어가는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검색 도중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대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걸요?”
어릴 적 이상한 여자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빨강머리 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인생의 고수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