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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pr 27. 2018

스페인 초딩들과의 한판 승부

팜플로나

스페인 초딩들과의 한판 승부     

팜플로나          


11살 일기

아빠가 최면을 걸어 쫒아버린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랑 여행 다니는 게 힘들어서 아빠가 이상해진 걸까?


9살 일기

아빠에게 초능력이 생긴 것 같다. 형은 아빠가 이상해진 거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는 분명 초능력자다.




헤밍웨이가 머물며 글을 쓰던 곳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걸어서 왔다면 이틀 이상 걸렸을 거리를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옛날 이곳을 다스리던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던 팜플로나는 헤밍웨이가 오랫동안 머물며 글을 쓴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매년 7월에는 소몰이 행사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Fiesta de San Fermín)'가 열린다. 헤밍웨이는 소설 ‘해는 또다시 떠 오른다’에서 그 소몰이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론세스바예스 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 형제들

지하 버스터미널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우리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가 출발했던 마을인 ‘론세스바예스’와 같은 이름의 거리가 나왔다. 커다란 기념물이 기다란 광장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Monumento al Encierro’ 즉, '소몰이 기념상'이란 이름의 이 기념물은 산 페르민 축제에서 소몰이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의 뒤가 아니라 앞에서 쫓기듯 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넘어진 채 겁에 질려 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소몰이’라기보다는 ‘사람 몰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쫓기는 사람들이 쫒아오는 소들보다 크게 묘사된 점은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을 조금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조각만을 놓고 본다면 '산 페르민 축제'는 약간 장난 같은 행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중에 찾아본 실제 소몰이 행사는 성난 소들이 하얀색 옷을 입은 남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추격하는 살벌한 행사였다. 실제로 소에 받쳐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매년 축제 반대 집회를 여는 주민들의 심정 역시 이해가 갔다.

     

사람들이 쫓기는 모습을 묘사한 소몰이 축제 동상

구도심의 중심지인 델 카스티오 광장 근처의 호스텔에 도착했다. 체크인 시간 전에 도착해 직원이 없던 까닭에 우선 로비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청소 담당 직원이 청소를 마친 후 방에서 나오다 우리를 발견했다. 내 이름을 묻더니 프런트 데스크에서 열쇠를 찾아 건네며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안 되었다고 조금 주저했더니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따스한 그녀의 미소에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노숙자와 무술고수


대충 짐을 풀고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근처 마트로 나왔다. 다행히 프랑스에서도 봤던 소규모의 마트인 ‘까르푸 익스프레스’가 있었다.  형제들은 들어가자마자 조그마한 장난감이 안에 들어있는 계란 모양의 초콜릿을 집고서는 특유의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고른 저 초콜릿이야말로 장난감을 계속 늘어나게 만들고 있는 범인이었다. 


갑자기 사나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계산대 부근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숙자로 보이는 허름한 행색의 긴 머리의 백인 남자가 계산대 여직원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계산대 직원도 지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어 소란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때 경비원 복장의 덩치 큰 남자가 남자를 제지하며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익숙하게 데리고 나가는 모습이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인 듯 보였다.   

   

“아빠, 여기 사람들도 막 싸우네요.”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성 프란시스코 공립학교에 들렀다. 아이들은 학교 앞 놀이터를 보자마자 소몰이 행사의 소떼 마냥 맹렬하게 달려갔다. 생각해보면 관광보다 놀이터가 더 어울릴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출출한 김에 마트에서 구입했던 1리터짜리 두유를 꺼내 마셨다. 


갑자기 옆에서 ‘휙, 휙’ 거리며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남자가 양손에 짧은 봉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무술 동작을 연습하고 있었다. 동작이 중국 무술의 그것과는 달라 보이는 게 어쩌면 이곳 원주민인 바스크족의 전통무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를 자세히 보니 낯이 익은 게 아까 마트에서 소란을 부리던 노숙자가 아니던가?  행색은 여전히 초라했지만 그럴듯하게 단봉을 휘두르는 모습과 긴 곱슬머리에 수염 가득한 얼굴이 영화에 나오는 무술 고수처럼 느껴지며 새삼스레 보였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함부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한판 붙자! 스페인 초딩들.


“아빠, 저 형들이 우리가 타고 있는 그네를 빼앗았어요.”

“저 형들 나빠요.”


일우와 혁우가 울상을 지으며 달려왔다. 그네가 있는 곳에 덩치 큰 스페인 아이들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수업 중간 휴식시간에 놀러 나온 이곳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아빠가 저 형들한테 말해주면 안 돼요?.”

“응... 그럴까?”

“아빠 할 수 있어요?”

“잘 봐. 아빠가 이렇게 눈빛만 보내도 저 애들이 떠날 거야.”

“에이, 거짓말.”  

   

내 말을 의심부터 하는 일우와 다르게 혁우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염력을 부리는 초능력자처럼 양쪽 눈에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셋!"


잠시 후, 아이들이 정말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 정말이네? 어떻게 한 거지?”

“바보야, 그냥 수업 종 치니까 들어간 거잖아.”

“그런 거야?”

"아빠가 거짓말 친거야."

“이번엔 내가 먼저 탄다.”

“아까도 형이 먼저 탔잖아!”   

   

옥신각신하던 아이들이 빈 그네가 있는 방향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쟁탈전이 벌어졌던 성 프란체스코  공립학교의 그네

 델 카스티오 광장을 지나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헤밍웨이의 단골이었다는 이루나 카페가 보였다. 혼자 왔다면 한 번쯤 들렀을 장소였겠지만 아이들과 함께 온 나는 먼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이루나 카페가 있는 델 카스티오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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