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기 전 펜을 들었다

몽롱한 하루 글로 숨 쉬다

by 힐링튜터

p.260) 비일상을 보내며 쏟아져 들어온 낯선 감각과 감정,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할 여유가 필요합니다.



나는 느린 사람이다. 느긋하고 여유가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의도해서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낼 때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여기서 몽롱해지는 것은 머릿속이 복잡하단 의미이다. 바쁜 일상이라는 말은 하루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의미이다. 무엇부터 할지, 어떻게 할지 머릿속에서 정리하다 보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날은 일을 빠트리지 않기 위해 투두리스트를 작성한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 바다 위에서 배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저녁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함께 누웠다가 그 길로 나도 잠들어 버린다.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사라진다. 그 시절의 나는 바다 위에서 길을 잃고 암석에 부딪혀 침몰하기 직전인 배처럼 느껴졌다. 암석에 부딪히기 전 나를 구해준 건 여행이었다. 일과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나를 위한 순간을 살아가는 것. 어디로 갈지, 무엇을 먹을지 정해지면 그다음부터는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 멀티플레이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시간이 아닐까. 하지만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여행은 사치였다. 그때 나를 지탱해 준 건 글쓰기였다.


힘들고 막막할 때 간간이 일기를 썼다. 다음 날 다시 읽어보면 감정과 생각의 흐름대로 써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은 글이었다. 하지만 꾸준히 쓰다 보니 조금씩 달라졌다. 글은 단순히 떠오르는 감정을 흘려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감정의 뿌리도 함께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힘들다'는 말 한마디로 넘겼을 상황도 지금은 '몽롱한 정신 상태'의 원인을 차분히 파악해 본다. 단지 '지금 바쁘니깐 나중에 말하자'라고 하는 것과 '지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너 이야기에 집중이 안 돼 그러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글쓰기는 여행이나 바쁜 일상처럼 낯선 감각과 생각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비일상 속에서 그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할 여유를 주었다. 마음의 방향을 잃고 헤매던 내가, 다시 나침반을 손에 쥔 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였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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