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의 봄이 생기와 기쁨을 안겨준다면 여름은 나른함과 뜨거운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가제보 밑에서 익어가는 계절을 바라보던지, 뽑아도 새로나는 풀들과 시들어가는 봄꽃을 제거하는 땀으로 채워가던지 택할 일이다. "뭘 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소소한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날 때는 잠들 때 외엔 없다. 그러니 적당한 염려와 근심은 곁에서 함께 가는 친구 같은 존재로 여길 일이다.
보리가 그저께 설사를 많이해, 주사 3대 맞고 이틀 동안 약 먹이고, 하루 굶긴 후 어제부터 밥을 조금씩 먹었다. 입맛이 떨어졌는지 오늘 아침 사료를 안 먹고 버티길래 고기를 약간 섞어 비벼 먹였는데 , 아침에 변이 약간 묽다. 이제 다 나았나 싶었는데,속이 단단히 탈 난 것인지 더 굶겨야 했었는지, 고기 약간 비벼준 것 까지 잘못한 생각만 들고 걱정이 된다. 약을 더 지어와야 할지... 여름이 되니 강아지들의 건강에도 더 신경 써야 한다. 2주 전엔 동네 산책 후 더위 먹었는지 늘어져 병원에서 주사 맞고 회복된 적도 있다. 나이가 있으니, 더운 여름에는 활달한 성정대로 마구 뛰어다니게 둘 일도 아니다.
지난 주말에 비가 오고 어제는 하루 종일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더운 날씨였다. 올여름도 무섭게 덥다는데 그 기세를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마당은 뜨거웠다. 여름의 햇살 아래, 봄을 밝혔던 꽃들의 흔적은 맥없이 흐트러진다. 이제는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봄꽃들을 보내고 정리해야 한다. 모든 것이 한창인 때와 비교하면 떨어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마당을 환히 밝혀주는 마가렛도 꽃잎은 떨어지고 누렇게 씨앗을 익혀가며 지저분하게 변하고 있다. 꽃이라서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다. 떠날 때까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가는 자연은 별로 없다. 빛나던 아름다움이 꺾이면서 초라해지고, 물러진다. 그럼에도 뿌리는 꽉 내려 뽑아내기도 힘들다. 이들도 살던 땅에서 뽑히긴 싫은 것이다. 변해가는 인간의 군상을 보는 듯해 아련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익힌 씨만 내면 마당에서 정리를 해줘야 하는데, 게을러서 제대로 뽑아내지도 못한다. 조금만 움직이면 땀투성이가 되니, 새벽 일찍 일하지 않으려면 여름 마당에서 일하는 건 삼가야 한다. 땀이라도 흘려보겠다고 땡뼡에서 무리했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다. 보고 즐겼으니, 거두고 치워주는 수고는 당연함에도, 전체를 가꾸는 일엔 소홀해지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파란 싹들이 움터오는 봄은 동토의 땅에서 막 생명을 여는 작은 움직임들 뿐임에도 불구하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꽉 찬 느낌이 드는데, 여름은 넘치게 차 있는 푸르른 열기에 비해 마음이 채워지진 않는 것 같다. 사방이 푸른 나뭇잎에, 풍성한 잔디와 풀, 여기저기 움직이는 벌레까지 온통 "무엇으론가"로 채워져 있지만, 마음은 공허한 때가 많다. 인생의 여름은 어디쯤에 비유할 수 있을까. 가을, 겨울이 남아있으니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춘시절이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한창 생활에 충실한 중년 초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름이 그렇듯이 온갖 것에 시달리는 시절이다. 신록의 푸르름을 미처 보내지도 못한 채 맞는 뜨겁고 갈증나는, 계절의 인생이다.
여름의 역할을 무엇일까. 젊은 청춘이 미래의 어지러움을 어찌 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여름은 예측할 수 없이 힘이 든다. 결실을 준비하고 한 시대를 마감하고 확실하게 달라지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돈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이런 혼돈속에서 채마밭의 오이는 익어가고, 자주 뜯어 먹은 상추는 대공을 보인다. 깨알같던 대추열매는 눈에 뜨일만큼 제법 모양이 난다. 뜨거움과 혹독한 주위환경속의 혼돈속에도 제 몫을 해내는 초목들에게 여름은 견뎌야 할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여름은 봄과 가을의 중간이고 가장 활동적인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봄의 멋과 가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은 어쩌면 없는 것 같다. 환경의 영향으로 계절의 선이 무너지고 있는 요즘은 더 그런 것 같다. 봄인 듯하면 여름이고, 여름인 듯하면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가을이 되는 것처럼 우리네 삶 역시 시작도 정년도 없이 지나간다. 평생 현역이라는 요즘은 계절의 허물어진 구분과 명백히도 닮아있다. 어차피 끓어짐없는 이어짐의 연속이 삶이다. 결과에 마음을 두는 일은 오래 전에 비워야 할 것들 아니었던가. 오롯이 과정에 충실하며 뜨거운 혼돈을 견디는 여름 날은 익어가는 하루를 펼쳐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