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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Jun 16. 2021

"책임지기"

제비와 영드



"인생은 살라고 있는 것이잖아요.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영드 인데버(endeavor)에서 여경찰 트루러브가 떠나면서 모스 경감에게 하는 말이다. 늘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소심한 모스 경감을 위해서 한 말이었다. 더운 여름날 늘어지는 일상의 허전함을 주말에 영드로 채웠다.  영국 드라마는 스텝이 느리고, 영국의 거친 전원이 그대로 보여 좋다. 수사극이라고 해도 결말의 풀이보다는 펼쳐지는 내용에서 영국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에 젖어들기에 좋은 드라마다. 처음으로 월정액에 가입해 시즌7까지 보고 만다.


영국의 낡은 정원과 숲과 펼쳐진 광야에는 정체된 우울함이 있다. 영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한 영국의 자연을 감상하면서 고풍스러운 모습과 느리게 진전되면서 유추해보는 인생의 의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인 건 아닐까. 개인적으로 영국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겠고, 파묻혀있는 역사가 많은 대자연의 스산함이 다른 나라의 붐비는 역사유적과 또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아기 제비 여섯 마리는 집이 좁을 정도로 많이 자랐다. 하얀 주둥이만 아직은 아기임을 나타낸다.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갔는지 애들 밥도 안 주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여섯 녀석이 계속 파닥거린다.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저렇게 커서 제법 날개 짓도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잘못하면 떨어진다. 제발 탈없이 있다가 남쪽 나라를 향해서 잘 날아갔으면 좋겠다. 이틀째 녀석들만 보이고 있고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새끼들이 커져서 계속 먹을 것을 챙기려 다니는지, 눈에 띄지를 않는다. 설마 녀석들을 버리고 갔을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혹시라도 챙기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어리석은 염려가 든다.  좁은 공간에서 여섯 마리를 낳고 키우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켰던 어미 제비가 무거운 책임감에 해방되고 싶어 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수사극을 좋아하는 편이라 미드 CSI 뉴욕,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편을 시즌별로 놓치지 않고 열심히 봤다. 빠르게 전개되며 디테일의 극치라고 할 정도로 잘 짜인 과학적인 극본에, 인간애로 엮겨진 동료 간의 끈끈한 교류가 CSI시청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빠른 전개의 미드에 비해 영드는 1.2배속으로 틀어도 느리다 생각되지 않을 만큼 굼뜨게 펼쳐진다. 사건을 풀어가는 주인공들은 범죄자나 피해자에 못지않은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 저변에, 자신들의 내면에서 나오는 막연한 책임감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책임감은 사명감도 아니고, 봉사심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성정에서 나오는 무게감을 그냥 두지 못하는 책임감이다. "시시포스(Sysyphus)의 공"처럼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한 책임지기의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영드는 미드와 달리, 보고 난 후에도 안개 낀 듯한 무거움이 가라앉아 있기도 한다. 사건은 해결됐으나, 답은 없는 삶의 막연한 부분을 들춰내는 것 같은 공감을 느끼게 한다. 


어미 제비와 아빠 제비가 다시 들락거린다. 제비는 "책임감"이라는 의무를 모를지도 모른다. 본성대로 낳고 알을 품고 키워서 떠난다. 어쩌면 저 어미는 작년에 우리 집에서 태어난 아이인지도 모른다. 알고 하는 "책임감"이나 모르고 해내는 "책임"이나, 산다는 것에는 해 내야 할 것이 있고,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굳이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거창한 명제가 아니더라도, 귓가에 적신 땀을 살짝 말려주는 바람처럼 자연 스러이 스며들게 하는 담담한 "책임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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