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합 한송이만으로도 충분하다

by opera

재작년에 심었던 백합이 작년엔 지질하게 나더니 올해는 풍년이다. 마당 앞뜰에도, 햇살 먼저 드는 동쪽에도 기다란 목대를 몇 달씩 끌어올리더니 활짝 피었다. 올해도 백합이 지질할까 싶어 봄에 구근도 두어 개 더 심고, 작은 분에 담긴 모종도 몇 개 사다 심었다. 정원을 제대로 가꾸는 사람들은 한 군데 모아 심어야 예쁘다고 하는데, 초보자 인터라 공간 있는 곳마다 꾸역꾸역 심었다.


혹시 구근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꽃도 못 피고 사그라들까 봐... 실제로 그런 때도 많았다. 그런데 모든 예상을 뒤엎고 백합이란 백합은 다 잘 자라서 꽃을 활짝 피웠다. 앞마당의 백합은 첫 봉우리 활짝 핀지가 2주가 넘었는데도 싱싱하고 옆에 아이가 덩달아 피어 깔끔하게 만개한지도 일주일은 된듯하다. 긴 지줏대가 부족하진 않은지 돌아본다. 꽃송이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간밤에도 비가 내렸나 보다. 얼마나 세게 퍼부었는지도 알 수없지만, 어쩌면 모두 잠든 새에 비는 제 할 일을 하고 아침에 급히 떠났는지도 모른다.


마당 잘 가꾸는 이웃들의 염려는 비가 쏟아지면 꽃이 다 물러진다는 것이다. 꽃이 흐드러지고, 엉망이 되어 장마 끝나면 닥칠 무더위에 풀들만 잘 자랄 곳으로 변해버려 염려라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아직 우리 마담의 백합은 비에 꺾이지는 않았다. 웃자란 상추 대는 이미 꼬꾸라져 있는데, 백합 몽우리는 여전히 맺혀있고 계속 꽃을 피운다. 어쩌면 이렇게 무작정 뜨겁지만 않고 비를 뿌려줘 백합의 수명이 길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백합이 아름다운 자태 못지않게 고마운 이유는 아침 일찍 현관문을 열고 마당에 나올 때 코끝을 찌르는 향기 때문이다. 백합 향기는 너무 독해서 꽃을 실내에 꽂아 두면 안 된다는 얘기도 있지만, 마당에서 제 마음대로 발산하는 향기는 아무리 독하다고 해도 마당의 모든 꽃과 나무에게 생기를 부어주는 살아있는 향기다.

백합향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향이다. 워낙 강해서 한마디로 "이런 향이다"라는 표현을 쓰긴 힘들다. 좋은 향수 만들 때 장미나 허브나 여러 꽃들의 향을 포집해 만들지만, 백합향의 향수가 드문 이유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다.


마당 사방에 백합이 심긴 터라 돌아가며 꽃을 피운다. 넓지 않은 마당이긴 해도 온 마당에 백합향이 코를 찌른다. 백합향은 꽃에 직접 대고 맡아보면 썩 좋은 향이 아니다. 어딘가 찝찔하고 톡 쏘는 듯한 퀴퀴한 향이기도 하다. 백합향은 멀리서 바람결에 맡아야 빛난다. 가까울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사람관계처럼 조금 떨어진 곳애서 맡아야 한다. 푸르름만 가득한 마당에 따사로운 안개가 내려앉은 것처럼 백합향은 푸르름을 더 빛나게 해 주고 살아있게 만든다. 눈으로 아름다운 마당을, 숨 쉬는 마음으로 느끼게 해 준다.


가시밭에 한송이 흰 백합화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야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한송이 백합의 향기만으로도 온 마당을 그윽이 채울 정도라는 시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찌뿌둥한 날씨에 마당의 백합은 아름다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로 오늘 아침 내 마음에 위로와 안식을 주는 좋은 친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