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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Jul 22. 2021

산격(山格)

산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이유



어제 늦게 잠이 들어, 오늘 아침엔 산에 가기가 싫었지만 그래도 나섰다. 해가 일찍 떠서 인지 6시인데도 중천이다. 산 입구에 도착하니 6시 20분, 벌써 차들이 몇 대있다. 지난주에 봤던 계속 얘기하면서 올라가시던 아주머니 두 분이 저 앞에서 차를 대더니 부지런히 올라간다.


처음엔 다리가 좀 무거웠으나 걸으니 또 걸을만하다. 같은 산에 매주 와도 다음에 오면 또 힘들다. 한번 가면 몸도 가벼워지고 뭔가 정복한 것 같고 좋긴 하지만, 등산의 약발은 그날 그 순간뿐이다. 너무도 빤한 사실이지만 생각해보니 사람 살아가는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금 일도 마찬가지다. 하루, 한 가지가 잘 풀린다 싶으면 별문제 없었던 것이 갑자기 뒤틀린다. 내일에서 보면 "오늘은 이겨낼 수 있는 하루"임에도, 순간을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 길이나 등산길이나 같다.  


삶도, 사회생활도 똑같은 것을 안다. 그런데 몸으로 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하는 것, 정신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을 견뎌내기 힘들 때가 많다. 인간이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격(人格)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인격이라는 것이 때로 무시당한다고 느껴질 때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알면서도 견디기 힘들다. 지금에야 인격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직에서 살아남기란 자신의 자존심은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매주 산을 찾으며 한 주간 쌓인 스트레스와 화를 산에 버리고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그래도 산은 받아들이며 그대로 있어 준다. 오를 때마다 땀 흘리며 힘들어도 산을 자주 찾는 이유 중의 하나리라. 살아가는 내내 반복될, 허물어지면 쌓아 올려야 하는 삶의 고랑처럼... 


발에 지천으로 낙엽이 밟힌다. 몇 주 전, 평상시 내려오던 길과 다른 곳으로 오니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그랬는지 낙엽이 정말 많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히 추워서 그랬는진 몰라도 나무에도 낙엽이 그대로 달려있고 산등성이에도, 다져진 길 모퉁이에도 낙엽이 많이 쌓여있었다. 낙엽은 낙엽이 아니었다. 나무의 자존심이고 상징인 푸르른 잎들이었다. 완성된 충족감으로 가득 찬 산의 격을 높이던 푸르른 잎들이었다.


이 낙엽들도 김춘수 님의 시에서 처럼 "누군가의 꽃을 피우고 난 후의 잎"이 아니었던가. 여기 땅바닥에 누워 비를 맞고 밟힘을 당하고, 지난해의 잎인지 혹 그 전 해의 잎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푸르른 청춘을 자랑하던 잎이었던 때가 있었을 낙엽들,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산은 산(山)이다. 산은 사람들이 배워야 할 산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오로지 자연에 존재할 뿐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생명을 더깊이 뿌리내리고 잎을 펼치고 또 하나의 거대한 자연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 산의 낙엽은 더 이상 낙엽이 아니다. 이것은 또 다른 푸름을 위한 젖줄이 되며, 낙엽조차도 푸른 잎과 어울리는 하나의 조화다. 어디 산에서 낙엽이 뒹군다고 신록이 돋아나지 않으며, 청록이 그 농염한 푸름을 감추기나 하던가?


산은 오래전부터 제자리에 있었지만 오늘도 새로운 이유는 누구에게라도 "처음"을 주기 때문이다. 처음 오른 사람이나 수십, 수백 번 오른 사람에게나 언제나 산은 "처음"을 내준다. 그것이 산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있는 이유다. 낙엽은 낙엽대로 신록은 신록대로, 청록은 청록대로 꽃은 꽃대로... 고개 숙인 작은 풀들은 풀대로 모든 것이 산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그게 조화다. 산에서 자라나는 모든 생명체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산을 찾는 많은 이들의 아픔과 바램과 버림까지 받아주며 품어 온 것이 산의 격, 산격(山格)이다. 


힘들어 찾아가는 산! "나를 나대로" 받아들여주고 세상에서 다시 부대끼며 살아갈 "처음의 용기"까지 부어주는 넉넉한 가슴을 가진 산, 그래서 산은 그 자리에 있지만 끝없이 날아가고 수없이 다른 모습과 다른 색으로 속살까지 준다. 산은 말한다. 산격(山格)이란 소릴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하찮은 자존심에 기반된 나의 인격에, 받아들임으로 점철된 자신의 격을 나누어 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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