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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Aug 03. 2021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을까



나는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지인들의 말을 빌자면 "골동품상"은 아니고, 초보"고물상"수준이라나. 비싼 물건들이 없으니 그리 말하는 것이다. 앤티크(antique)보다 빈티지(vintage)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끔 tv로 방영되는 수준의 많은 것을 모아두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다. 그냥 일상에서 쓰던 것들 책도 물건도 오래 쓰고, 잘 안 버리는 편이다.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이 있는 편이고, 그러다 보니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거기서 도를 넘진 않으려고 한다. 작년에 이사를 했는데, 짐을 정리하다 보니 요즘 시류로 말하면 "안 쓰는 것, 3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등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왕창 버렸다. 아마 가장 많이 버린 것이 책이었던 것 같다. 책은 읽으면서 다시 볼 것처럼 접어두고 밑줄도 많이 긋는다. 그런데 전공서적 외엔 시간이 지나도 대부분 다시 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전공서적도 계속 보완되어 새로운 책이 나오기에 너무 오래된 것은 치우는 게 낫다. 그럼에도 거실이나 방의 벽면을 장식한 책장의 책만 보고 있어도 뿌듯하고 마음의 양식이 채워져 배도 고프지 않게 느껴지는 건방진(?) 행복감에 책은 참 버리기 힘들어 오랜 시간 끼고 살아왔다. 아직도 치워버리면 집이 훤해질 텐데 하는 부분도 많다. 


역사를 좋아 하기에 꼭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들 사는 세상을 공감하고 싶어서 인 것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기에 좋은 것이다. 나와 함께 한 오래된 것에는 추억이 깃들어 있고, 다른 이들과 오래 한 것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여행 중에도 시간이 나면 "벼룩시장(flea market)"을 찾는다. 시장 이름의 유래가 재밌다.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들이 많아 "벼룩시장"이라고 불렀다는데, 요즘은 전문가 수준의 중간상인들도 많아 진짜 오래되고 귀한 물건들, 예전처럼 벼룩을 보긴 힘들 것 같다. 벼룩시장에 들르면 구경만 해도 재밌다. 내가 사고 싶어 하는 것들은 주로 문구류나 티스푼, 그리고 강아지 인형이다. 욕심을 부리면 한없이 수집하고 싶어 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뇐다 "세상의 모든 00을 다 가질 수는 없잖아..." 주로 구경하고 말지만, 가끔 눈에 띄어 하나씩 모아둔 것도 좀 된다. 그저 보면서 여행기를 쓰듯이, 그때 즐거웠던 기억을 잠시 떠 울린다. 


아끼는 강아지 조형물이 있다. 하나는 베를린 티어가르텐 벼룩시장에서 1유로인가 주고 산, 황토로 빚고 깎은 개 두상이고 하나는 나가사끼 골목길에서 천 엔 주고 산 무쇠 강아지 상이다. 개 두상에는 "DONNO 82"라고 새겨져 있다. 아마 미술학도가 조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유럽 벼룩시장에는 가끔 귀한 물건들도 나오겠지만, 역사가 오래된 만큼 집안에서 썼던 물건들도 많으니,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다 나온다. 버리지 않고 이렇게라도 파는 것이다. 


무쇠 강아지를 팔던 할아버지는 1940년 전쟁 당시 만들어진 것이라 쇠가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당당하게 서있는 강아지조차 정복의 꿈을 가졌던 것일까. "DONNO"가 개의 이름이었는지 조각가의 이름이었는지 모르겠다만, 사랑받던 사랑하던 이는 틀림없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는 훌륭한 조각가가 되었을까? 오래된 물건에는 추억과 사연이 있다. 본 적도 없는 낯선 이의 이야기 한 조각이 내게까지 전해져 온다. 새로운 것도 좋고 쉽게 갈아치우는 변화도 좋지만,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오래된 것도 좋다.


이베이 옥션을 뒤져서 펜 트레이(pen tray)를 하나 샀다. 가격에 맞고 고풍스러우며 아름다운 예술품의 느낌이 나는 것을 찾았으나 맘에 드는 것들은 생각보다 가격이 너무 비쌌다. 마침 적절한 가격의 은도금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펜 트레이를 발견하고 6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직구했다. 가운데 트럼펫을 부는 아기천사가 양각되어 있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는 펜 트레이다. 나는 펜 트레이로 생각하고 샀지만, 판매자는 펜이나, 빗(comb tray) 트레이 일지 모른다고 했다. 글쎄 누구의 머리를 빗어주던 빗을 놓던 것이었던지, 누군가를 위한 글을 쓰던 펜을 놓던 펜 트레이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펜 트레이였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지 작년에 샤프펜을 구입할 때는 3주 안 걸렸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드디어 받았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가볍고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코올로 소독한 다음 치약을 솜에 묻혀 몇 번이고 구석구석 닦아낸다. 오래된 흔적과 시기가 시기인지라, 위생적으로도 철저히 닦아야 했다. 솜에 검은 때가 묻어 나온다. 판매상이 사진을 찍어 올리기 때문에 최대한 닦아서 광을 냈겠지만, 내 손을 거치고 나니 화려하지 않게 반짝이는 은백색의 아름다운 자태를 내보인다. 


펜 트레이에 사용하는 펜들을 둔다. 오래전에 이것을 사용했던 그 누군가가 아름다운 글들을 썼던 것처럼 나도 살아있는 글들을 쓰리라 생각한다. 마치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오랜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기쁨이다. 덥고 짜증 나기 쉬운 이 여름에 소품 하나로 뿌듯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행복감이, 오래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작년에 구했던 샤프펜과 제자리를 찾은 펜 트레이

트럼펫을 부는 아기천사가 양각되어 있다

무쇠 강아지와  개 두상

DONNO는 이 아이의 이름일까 조각한 이의 이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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