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가 옷을 벗어 버렸다
지난 한 해 모질게 괴롭힘을 주던 모든 것으로부터,
막아주고 지켜주고 방어해 주던 그의 옷을 벗어 버렸다
속살이 하얗게 드러난 배롱나무는 신기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벌거벗은 제 몸뚱이와는 상관없는 듯,
맨살로 붉은 꽃 뭉치들을 소담스럽게 매달고 있다.
이 꽃을 피우자고 일 년을 버티어왔는데...
살 껍질을 내어주고서야 꽃을 피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솔직하게 알몸을 드러낸다.
백일이 넘어라 하고 붉은 선물을 내게 주면서
마지막 남은 살 조각 하나까지 털어내 버릴 것이다.
오는 가을과 겨울, 새 계절을 맨 몸뚱이로 맞으며
한 해의 바뀜을 더없이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배롱나무는 자신의 껍질을 벗어버린다.
너는 너를 버티게 해 주고 지켜내 줬던,
경험과 능력과 지혜의 껍질을 벗어버렸던가?
교만의 껍질을 버리고 온전히 알몸이었던 때가 있었던가?
배롱나무가 묻는다.
한 번이라도
순전한 받아들임으로,
욕심으로 점철된 살 껍질을 벗겨버리고
나무처럼
배롱나무처럼
아낌없이 내어주는
꽃그늘이 되어보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