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누워서 스마트 폰으로 글을 쓴다. 이렇게 빈둥거려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창문 블라인드 바깥쪽은 햇살도 없이 거뭇거뭇하다. 오늘은 흐린 것이다. 더욱 좋다. 봄비가 온다고 예보되어 있으니 찰랑찰랑 장화 소리가 나도록 내렸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어제 사다 심은 으아리 2개와 불두화, 목단과 새로 나왔다는 서양 목단(금각)이 제대로 뿌리를 내릴 것이다.
작년에 꽃을 많이 피웠던 으아리가 흰색인지 분홍색인지 헷갈려 분홍색과 보라색 으아리를 샀는데 으아~ 사진을 보니 분홍색이었구나, 흰색을 샀어야 하는데... 그래도 뭐 어뗘랴 어느 색이면... 그저 활짝 피어 오래오래 올여름도 밝혀주면 좋겠다. 으아리 꽃이 사랑스러운 이유 중의 하나는 넝쿨로 올라가면서 계속 피어나기 때문이다. 지루한 여름 더위에도 환한 모습으로 제 값을 한다.
퇴비를 세 포대 뜯어 채마 심을 조그만 마당과 새로 만든 꽃 정원에 쏟아붓고 삽질했다. 그래서 온몸이 뻐근해 어젯밤 늦게 잘 때는 내일 아침은 작정하고 늦잠 자고 피곤 풀리라 했던 것인데, 모닝콜에 맞춰 익숙해진 내 몸은 6시에 나를 깨우고 만다. 그래도 오늘은 금방 일어나지 않고 작정하고 빈둥거려본다.
( 작년 여름을 밝혀 주었던 으아리 꽃(클레마티스) )
( 새로 심은 으아리 두 그루 ) ( 새로 심은 서양 목단 (금각) )
모처럼 흐린 날씨에 빈둥거리기 까지 하니 기분이 좋다. 규칙적인 일상의 연속으로 잠시라도 빈둥거리면 마치 죄라도 짓는 양, 일요일도 제시간에 눈 떠지게 훈련된 매일에서 벗어나 쉬어가기로 변화를 주었건만, 종류도 다양한 뭔가에 의해 끓임 없이 재촉질 당하는 현실이다.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전화가 부르고, 책을 보려면 강아지들 산책시켜야 하는 책임감이 누른다. 잠시 쉬는 동안도 멍 때릴 수 있는 순간이 없다. 아니 스스로가 멍 때리는 순간을 아직 허용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아깝고 해야 할 일은 많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몸과 마음에 새로운 공기가 자리 잡을 여유가 아직은 부족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 아침처럼 날씨 핑계 대고라도 뒹굴거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건강과 마음 내려놓기를 위해 아침 일찍 마을 뒷산에서 강 쪽으로 열린 테크 길을 산책하기 시작했는데, 이 즐거움도 어느새 하루라도 쉬면 안 될 만큼 강박적인 일상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물론 이런 강박감은 즐기다 보면 "여유의 산책"으로 승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는 발견으로 웃어넘긴다. 강박적으로라도 걸으면 너무 좋다. 계절의 변화를 "걷는 것"처럼 느끼기 좋은 게 있을까? 요사이는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몽글몽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다. 금방이라도 입만 벌리면 봄꽃이 환하게 온 동네 길을 밝힐 것 같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치기 시작하는 초봄이면 산수유는 벌써 꽃눈 틔울 준비를 한다. 어느새 산수유는 노랗게 피어 봄 길을 밝혀놓고 있다. 걸어야만 잘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봄의 정경들이다. 머릿속엔 봄비로 어제 심은 아이들이 촉촉이 젖어가며 뿌리를 잘 내릴 기쁜 상상을 하면서도, 이리저리 뒤척이며 따뜻하고 포근한 게으름을 맘껏 피워본다.
나의 게으름에 제일 즐겁게 반응하는 녀석들은 우리 강아지, 보리와 승리다.
그르렁 거리며 자다가, 내가 뒹굴거리자 언제 드르렁거렸냐는 듯이 이불 위에서 으르렁대며 장난질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질세라 주둥이를 들이대며 여기저기 찌른다. 만져 달라는 것이다. 쓰다듬어 달라는 것이다. 소심한 보리는 앞발로 너무도 살짝 어깨를 건드린다. 이불 들쳐주면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신호다. 개는 솔직하다. 좋고 싫은 게 너무나 분명하다. 배를 드러내고 누워서 함께 뒹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인을 막무가내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뢰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게 되어있다.
창문 밖으로 솔솔 봄비 소리가 들린다.
흐린 날씨는 벌써부터 봄비를 내려보냈나 보다.
오늘 아침엔 우리 강아지들도 모처럼 여유를 부리는 나의 게으름에 온 몸으로 공감하고 있다.
( 세상 편하고 여유롭게 낮잠 자는 승리와 보리 )
(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 보면 싫지 않은 ~ 강아지 코 고는 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