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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Aug 24. 2021

아호(雅號), 또 하나의 이름으로

나의 아호(雅號) 이야기


어제오늘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물이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물이다.

너무 많게도 말고, 너무 적게도 말고 적당히 내려주면 좋으련만 하늘이 하는 일을 내가 알 순 없다.

나는 물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도 물속에 있었고, 태어난 곳도 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지금도 강을 바라보며 살고 있으니 물과의 인연이 깊다면 깊다.

그래서인지 비도 좋아하고 바다도 좋아한다. 비 오는 오늘 같은 날이면 여유가 있고 고즈넉한 풍광에 추억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대학시절 취미로 서예반에서 활동을 했다. 남은 작품도 없지만, 그때 교수님이 서예를 오래 하신 어르신이셨다. 서예 반원들에게 "아호(雅號)"를 하나씩 지어주셨는데, 나에겐 "은강(銀江)"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은"은銀"자에 성"강江"자라고 하셨다. 처음으로 아호를 얻고 들뜬 마음으로 우리들은 열심히 붓글씨를 배웠던 것 같다. 작품전도 한번 했는데,  대학시절 이후론 한 번도 서예를 하지 못했다. 졸업하고도 못 뵈었고 아마 지금은 돌아가셨겠지만, 왜 그런 아호를 주셨는지는 살아가면서 이해가 됐다.


당시는 몰랐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왔던 나의 아호에 대한 정리를 해본다.


1. 물은 흘러야 한다. 물은 한 곳에 정체하지 않는다고 했다. 항상 흘러야 한다.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니, 좋은 뜻으로는 부지런히 맡은 일에 충실하고 무엇을 하든지 해내야 한다는 뜻 이리라. 더 깊게 말한다면 그저 편히 먹고 살 팔자는 아니라는 말로도 이해된다. 지금껏 놀고먹지는 않았으니 이름값을 하긴 했다.


2. 삶을 유하게 살라는 뜻을 주신 듯하다. 흐르는 물은 구부러져 흘러도 모가 나지 않는다. 어디든 파고들어 가 흐를 수 있는 것이 물이다. 부드럽고 유하게 인생을 살아가라는 의미를 오래전에 주셨는데 매 순간을 부드럽고 유하게 살지는 못한 것 같다.


3. 강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주셨다.


3. 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씻기어 간다. 인생사의 희로애락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주변의 여러 요란함에 후다닥 반응 말고 가던 길대로 묵묵히 가라는 뜻이셨다.


4. 은은 독성물질에 흑변 하고 살균 효과도 있다. 공기 중에 오래 노출되면 녹이 쓴다.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난다.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말고 나를 빛내게 하는 도구로 여기라는 말씀이다.


5. 은은 금보다 화려하게 빛나지 않지만, 수수하고 은은한 기품이 있고 귀금속의 용도보다 산업적인 활용도도 높은 광물질이다. 실용적으로 내면에 충실하라는 의미였으리라 생각된다.


6. 강도 바다보다 크지 않다. 은도 금보다 위일 수는 없다. 첫 번째를 생각 말고 늘 겸손하게 온화한 삶을 살라고 빌어주신 것 같다. 돌이켜 보니 "최고"보단 "최선"이 종내에는 나에게 덕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7. 더 많은 의미와 깨달음이 있을 나의 아호에 지금까지 깨달은 것도 실천하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 조목조목 다 떠올리기도 부족하다. 매일을 흐르는 강물처럼 욕심을 내려놓고 산다면 구르는 돌을 만드는 강이 될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 든다. 


물론 아호 하나에 교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의미를 두고 지으시진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대리석 낙관까지 직접 새겨 반원들에게 주시면서 붓글씨를 지도하시던 교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살면서 작은 힘이라도 되어줄 뜻깊은 선물을 주셨던 것이다. 그동안도 나의 아호에 몇 가지 의미를 두면서 "은강"이라는 아호를 소중히 생각하긴 했지만, 오늘 글을 쓰다 보니 앞으로는 더 많이 불러야 할 이름이란 것을 새기게 된다. 생각을 조금 깊이 했더라면 브런치 작가 응모할 때도 아호를 썼어야 하지 않을까는 마음도 든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보면 이름값 못하고 산 때가 더 많았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이름값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있다. 늘 불리고 사는,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석자는 올곧게 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아주 착하지는 못해도 악하지는 않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교수님이 관상이나 한문 이름을 보고 지어주셨는지는 모르지만, 관상(觀想) 보다 좋은 것은 수상(手相)이요 수상보다 더 좋은 것은 심상(心想)이라고 말씀하시며 주셨으니, 살아가면서 이름값의 의미를 생각하는 "유(流)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어주신 이름의 의미처럼 자연의 일부인양 모나지 않은 너그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때로 그렇지 못하는 부족함을 나무라기라도 하듯 마당 데크 위의 빗물 소리가 요란한 오후다.




p.s. 며칠 전에 작고하신 작곡가 고 이수인 님의 "내 마음의 강물"을 김호중 씨의 노래로 올립니다. 생전 주옥같은 한국 가곡들을 작곡하셨던 고 이수인 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제자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던 노교수님의 마음은 "정精"이었음을 감사드리며 올려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ZWrijnb8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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