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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Jan 20. 2022

스마트폰으로 쓴 이탈리아 기행기 4. 폼페이, 나폴리




2019.09.23

2004년 힘들게 휴가를 내서 유럽 여행 중 폼페이에 왔었다.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재점검을 해보자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왔던 곳이었다.  2019년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저 견디고 오느라 수고했다"라고 만 자백할 수밖에 없다. 여행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되지만, 너무 큰 목적을 가지지 않고 쉬어가는 텀의 여유만으로도 충분하다.


N과 J, P와도 일할 때 사소한 마찰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전엔 알지 못했던 관계의 단순함도 재 발견하게 된다. 함께 여행을 해보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고 했던가.  늘 하던 얘기대로 결국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견디기 힘든 그 순간도 견디기만 하면 다음 편이 찾아온다. 지금도 마찬가지인걸 보면 그게 인간의 한계이고 다시 적응해 가는 과정인 듯싶다. 그러나 한편씩 겪어낼 때마다 강해지고 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내 맘먹기에 달린 거다.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맞으니 또 다른 행복이다. "걱정은 여기서 버리고 가자"에 우리는 공감한다.


유럽지역을 다니다 보면 하루의 삶에 만족하고 단순한 삶을 즐기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는다.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은 태평으로 보일 만큼 걱정을 않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찾아온 유럽 경제 위기 직격탄을 맞았던 스페인이나 그리스 등 우리나라에서 볼 때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던 그때도 살고 있던 사람들은 조금 힘들기는 했어도 그들의 일상을 누리고 살아갔다. 마침 2012년 스페인을 방문했던 때라 곁에서 그 삶을 볼 수 있었다. 살고 있는 그들보다 잠시 다녀가는 이방인이 더 걱정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오랜 역사 속에 자신들의 삶도 결국 역사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랄 때부터 보고 느끼며 살아서인지, 매사에 담담한 편인 듯하다. 매일 접하고 다니는 동네에서 수백 년 된 건물과 유적들 속에서 현대의 변화와 함께 부대끼며 살다 보니 웬만한 일은 담담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가 걷고 있는 이 거리에서도 오래전에 누군가가 희열과 절망을 흘리며 살아갔던 곳이니 자신 역시 역사의 한 장에서 그러할 뿐이라는 공감을 가지지 않겠는가.


이른 아침, 빵 한 조각과 카푸치노 한잔 즐기며 폼페이로 떠난다. 가이드 조 선생은 제법 큰 푸조 RV차를 가지고 있어 다섯이 타도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폼페이는 나폴리 근처에 있으며 로마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여기는 오토바이도 고속도로 주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승용차는 130km/h 버스 100km/h 트럭 80km/h 이상 속도로 주행하면 안 된다고 한다. 로마에 몇십 년을 살고 있는 성공한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점들과 이탈리아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며 간다.

 

로마에서 살려면 평균 1,400유로 정도의 생활비가 든다고 하며 학비는 대학까지 나라에서 대준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선 정치적으로 부패가 많은 편이라 한다.  그런 것들이 이탈리아 경제위기의 원인이기도 하고 마피아나 탈세, 엘리트형 부패도 많다고 한다. 물론 그분 개인의 의견일 수도 있다. 일반 시민들은 그러려니 하고 정치에 별로 상관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대기업이 경제를 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탈리아는 중소기업이 건재 하기해 경제가 유지된다고 한다. 자신들의 기술력과 자부심으로 오래된 전통과 가업을 잇고 사업을 키워가는 것이다. 볼로냐의 유명한 자동차세계적인 자동차로 성장한 이유도 그에 기인한다고. 또한 지역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 상품은 더 확실하게 품질을 보장한다고 한다.


점심때가 다 되어 폼페이에 도착한다. 먼저 점심을 먹고 폼페이 유적지를 관람하기로 한다. 아마도 단체 여행객을 많이 받는 듯한 준비된 식당에서 풍기 버섯과 스파게티를 먹었다. 폼페이가 예전보다 훨씬 상업적으로 변해 있었고, 유적지도 발굴과 보존작업을 계속해서 인지 내부도 많이 달라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벽화나 모자이크 같은 것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예술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은 전부 박물관으로 옮긴 듯했다.

귀족 주택도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지금 웬만한 곳의 모두 내부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을 친 곳도 많았다. 관람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세대에만 보고 말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 후손들에게도 그들의 선조가 어떻게 살아왔음을 보여줄, 앞으로 대대로 물려줄 문화유산이 아닌가 그러니 철저한 안전과 또 보존을 위한 노력은 꼭 필요한 일이다.


폼페이(Pompeii)는 고대로마의 도시이다. 이탈리아 남부 캄포니아주 나폴리 인근으로,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폼페이 코무네에 속한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의 분화로 인근의 헤르콜라네움 등과 함께 화산재와 용암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폼페이, 위키백과)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폼페이는 당시 폭발로 도시인구의 10%였던 2,000명 이상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2014년에 개봉되었던 "폼페이 최후의 날"을 보면 당시 사회나 화산 폭발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고통 속에 사라져 간 사람들의 마지막 행적을 잘 볼 수 있다. 폼페이를 다녀온 후 영화를 봤기 때문에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발생한 통가 해저 화산 폭발로도 전 태평양 연안에 영향을 준 것을 보면 인류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싸우려 하기 전, 먼저 지구와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는 경고가 아닐까 싶다.


폼페이 유적지는 허물어져 있는 유적들과 거대한 신전, 아직도 건재하는 돌로 다져놓은 길거리, 골목마다 생활상이 그대로 보이는 건축물, 작은 집들의 이어짐을 도보로 산책하듯 보고 다니는 것이 좋다. 오래전에 왔을 때 공중목욕탕 한가운데서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배를 드러내 놓고 뒹굴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인간사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문화 유적지가 강아지의 놀이터가 된 것이다. 물론 오늘은 볼 수 없었다.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차단되어 있었다. 이천 년 전에도 피자를 구워내던 화로의 모습오늘날과 다르지 않음을 본다. 이천 년 전 조상의 유적으로 오늘날의 후손들이 생업을 이어갈 줄 생각이나 했을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이탈리아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염려도 된다.





폼페이에서 나폴리로 나와 나폴리 박물관에 들른다. 워낙 오래된 도시에다 개발도 많이 하지 않아 그런지 구도심 거리는 좁고 차들은 뒤엉켜 다닌다. 그래도 신기하게 조화롭다.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박물관 주변 길거리 적당한 곳에 주차한 후 가이드분이, 유명한 문화재들만 빠르게 소개해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나폴리 항구를 구경하고 로마로 올라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한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박물관이며, 특히 고대 로마 관련 분야가 그렇다.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시기의 유물들과 인접한 폼페이, 스타비아에, 헤르쿨라네움의 고대 로마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르봉 왕실 박물관(Real Museo Borbonico )이었다(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위키백과). 박물관 내부에서 책에서 많이 본 듯한 유명한 작품들을 만났고, 고대 로마 사람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


나폴리 박물관을 보고 나폴리 항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폴리는 로마와 밀라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답게 시내가 복잡하고 촘촘히 붙어 있는 건물들과 자동차 매연 때문에 공기가 혼탁한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푸르른 바다는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라는 나폴리의 오래된 명예를 아직은 지켜주고 있는 듯했다.

 




나폴리 항구는 시민들의 휴식처였다. 바다는 막히지 않은 수평선 끝의 광활함이 현대인의 풀리지 않는 답답한 가슴을 확 뚫어 주기라도 하는 것 같이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도로 다독거려준다. 물론 꽉 막혀 보이는 듯한 산속에서도 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으로 펼쳐진 전원의 평화를 얻기도 하지만, 아무튼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것이 자연이다. 그리고 바다나 산이나 그들은 오랜 인간의 역사를 곁에서 묵묵히 보고 함께 감당해 온 좋은 벗이기에 더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나폴리의 바다는 확 펼쳐진 바다가 아니다. 좁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수많은 요트들과 배들이 만을 메우고 있고, 마치 헤엄이라도 치면 닿을 듯한 거리에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서기 79년 북풍이 아닌 동풍이 불었다면 폼페이 대신 나폴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사람이 예측하지 못한 가늠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역사는 아이러니다. 인간의 잣대로 옳다 그르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를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껏해야 한 세대, 백 년을 거쳐가는 역사 아니던가. 수천 년의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베수비오 산을 바라보며 나그네는 잠시 숙연해진다.




저녁은 가이드 조 선생이 잘 아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기로 했다. 커다란 스테이크에 소금과 후추 외 다른 양념도 하지 않은 듯했는데, 맛이 깔끔하고 고기 냄새도 안 났다. 일행 중 N이 볼로냐에서 먹어본 납작 복숭아의 맛을 기억해 계속 찾았었는데, 마침 인근 가게에서 납작 복숭아를 발견해 많이 샀다. 남쪽이라 그런지 과일값은 비싸지 않았더. 7킬로 정도 남아 있던 것을 8유로에 샀다. 식당에서 몇 개 씻어 달라 부탁해 스테이크와 납작 복숭아 후식의 멋진 저녁 식사를 즐기고 로마로 향한다.


오늘 다시 찾아본 폼페이는 모두의 부러움을 받던 영광의 터전에서 한 순간에 허물어져버린 역사의 잔재였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산다는 것은 공평하기도, 때로 불공평하기도 한 것.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할 순 있지만, 불평 때문에 공평의 기준이 허물어지면 안 된다. 사실 공평의 기준도 각자의 잣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결국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할 수 있다면 여러 배역을 맡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싶어서 모두들 인생 마라톤에서 사력(死力)을 다해 뛰는 것이다. 다만 사력이 사력(死力)이 되지 말고 앞뒤를 돌어보고 때론 좋은 공기도 음미하면서 함께 걷고 달려가는 사력(思力)이 되면 좋겠다. 여행은 사력(思力)이 되어 주는 좋은 친구다.




쏘렌토는 폼페이와 나폴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합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목소리로 "돌아오라 소렌토로" 들 들어보며 나폴리를 그려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7oypam_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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