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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Aug 17. 2022

PDA로 쓴 독일, 네덜란드 기행기 4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 여행후기


2005.10.14

유럽여행의 백미는 기차여행이 아닐까 싶다. 처음 유럽 고속열차 테제베(TGV :Train of Great Velocity)를 탔던 것은 서유럽여행 중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갈 때였다. 지인들과 담소하며 설레고 즐겁게 보냈던 추억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KTX는 산들과 터널로 이어진 다양한 풍경을 연출하지만 여긴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 사이로 오직 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고속열차 이체(ICE) 역시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어둠에 잠긴 들녘은 멀리서 보이는 작은 불빛으로 농가가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여행 시에 특별히 선물을 챙기진 않는다. 그래도 독일 간다니 어린 조카가 기차를 꼭 사 달라고 당부를 해 마음이 쓰였는데  (어린아이들에게 기차는 꿈의 상징 이기라도 되듯 유달리 기차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마침 뒤셀도르프에서 장난감 샵을 발견해 이체 모형기차를 사서 남은 시간 부담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다. 왕궁과 정부 기관의 대부분은 헤이그(덴 하흐)에 위치해 있지만 네덜란드 헌법에서 규정된 네덜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다. 1275년경 암스 털 강(Rivier de Amstel)에 둑을 쌓아 건설된 '암스 텔레 담(Aemstelredam)'에서 현재의 "암스테르담"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암스테르담은 '암스 털 강의 댐'이라는 뜻을 지닌다(나무 위키).

운하가 밀집되어있는 구시가지에 대부분의 유명 관광지가 밀집되어 있어 암스테르담 역 주변에 숙소를 정하고 걸어 다니며 관광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비가 약하게 내리는 늦은 밤에 암스테르담 역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둔 역 근처의 호텔을 찾아갔는데, 인터넷으로 본 것보다 열악한 호텔이었다. 프런트에 있던 여직원에게 예약 서류를 보여주며 방을 안내받는데, 쾰른 근교의 있던 작은 호텔보다 더 좁고 답답한 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담배냄새가 많이 났다. 경비 때문에 오성급 호텔은 못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이틀 밤을 지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 한다. 좁은 것은 이해하더라도 냄새를 어떻게 견딜지도 고민이다.  예약할  분명히 비흡연방으로 했는데... 이 호텔에선 아예 비흡연 방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호텔 로비에서 자유스럽게 술을 시켜먹고 있는 풍경도 여느 유럽과도 다른 풍경이다. 암스테르담은 모든 것이 자유로와 보이는 풍경이었다. 백인은 물론 흑인, 황인종  다양한 형색의 사람들이 모여있고, 어떤 제제도 없이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네덜란드는 2000년 세계 최초로 성매매 합법화를 도입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드러내 놓고 풍기 문란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묶게 된 호텔이 역주변이고 홍등가가 가까워 다른 곳보다 자유분방한 느낌을 풍길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시내 관광을 할 때는 알고 있었던 예쁘고 깔끔하고 잘 꾸며진 암스테르담이 있었으니까...


늦은  밤 시간이라 해도 답답한 호텔에 있기 불편해 우리는 짐을 푼 후 광장 쪽구경하기로 했다. 중앙역 주변이 시내 중심가라 호텔에서 어디로 가도 편리하게 걸어갈 수 있다. 담광장으로 나와 네덜란드 왕궁 앞에서 사진도 찍고 구경하는데 사람들도 무척 많다. 광장 못 미쳐 홍등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라"고 외치는 한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했더니, 복 받으라고 한다. 성매매가 합법화된 곳이라 여러 사람들이 전도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암스테르담 역 광장에서 시내 쪽으로 가는 길에 휘황찬란하게 불빛 아래 요란한 술집들과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번잡한 곳들이 많다. 합법화된 홍등가인듯하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 문을 연 마켓이 있는지 보기 위해 조금 더 올라갔지만, 가게들 문을 닫아 그냥 호텔로 돌아왔다. 아마도 역 주변의 홍등가는 이제부터 시작인 양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떠들고 보낼 듯하다. 호텔에서도 그 소음이 조금 들리는 듯했다. 일정이 빠듯했고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스키폴 공항으로 가야 해, 역 주변의 호텔 택했기 불편해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경험도 이때 하지 않으면 언제 하랴" 생각하며 암스테르담의 두 얼굴을 보는 경험도 가져본다. 호텔방은 답답했지만, 클레베에서의 상쾌했던 공기를 생각하며 그래도 마음은 풍요롭게 하룻밤을 보냈다.


밤에 본 암스테르담 중앙역 / 아침 모습

담광장에서 암스테르담 궁전  / 시내 거리


2005.10.15

아침에 일찍 일어나 광장 쪽으로 산책을 했다. 어젯밤에 가물가물했던 안개비가 청소라도 해주려는 듯 흩뿌리고 있다. 간밤의 화려하고 요란했던 흔적이 길밖에 내놓은 쓰레기들로 증명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도시의 뒷모습을 도시의 상징인 중앙역 주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호텔 위의 전광판에 회개하란 글이 새롭게 보이는 아침 일곱 시, 부지런한 일상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로 암스테르담의 하루가 열리고 있다. 다양한 자전거들이 이리저리 자전거도로를 누빈다. 분무기로 살짝 뿌려주듯  이슬비를 맞으니, 얼굴이 시원하게 간질거린다. 호텔 안의 좋지 않았던 공기가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호텔 매니저는  볼티모어 출신의 흑인인데 여기 온 지 16년 됐단다. 빵 배달하는(아니 빵을 사 온 사람인지...) 남미 출신 여자와 지난여름 1,8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루지애나의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9월에 발생한 파키스탄 지진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말세 얘기를 한참 하고 있다. 나도 "정말 마지막 시대의 혼돈인 것 같다"라고 거들다 보니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낯선 곳에서 반갑게 만난 친구처럼 아침의 대화를 즐긴다. 유럽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네덜란드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곳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현재는 유럽도 난민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2005년 당시만 해도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 친구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비교적 폐쇄적인 우리에 비해 외국인은 낯선 시람을 봐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개방적인 점이 많다. 어쩌다 한국인을 만나면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인지 눈인사라도 하려면 서로 외면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호텔은 누추했지만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흘러나오는 재즈에 맞춰 좁은 로비 한 구석에 놓였던 몇 개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삶을 향유하던 사람들의 구속되지 않은 자유가 살짝 부럽기도 했었다.


오늘 암스테르담 일정은 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 는 단체 관광을 하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외곽의 풍차마을을 방문하여 치즈, 나막신 만드는 것 보고 대서양이 보이는 항구에서 시간을 보낸 후 오후 두시반에 도착 예정이라고 한다. 버스가 암스테르담을 벗어나니 밤에 보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풍차가 서 있는 농가와  넓은 초장위로 자유롭게 풀을 뜯는 젖소들이 보인다. 목축업의 나라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날씨가 화창하지 않아 소들이 춥지나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염려를 하며 차창밖의 흐린 풍경에 젖어본다.


풍차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자체가 마치 미니어처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고, 이미 관광객들이 자주 와서 그들의 살고 있는 모습까지 상품화된 것을 인식하기라도 한 듯, 마을 전체에 네덜란드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흔적으로 꾸며져 있다. 마을 곳곳의 운하 초록으로 뒤덮은 연두색 작은 크로바 수초,  그위를 평화로이 유영하고 있는 오리 떼들... 인상 깊고 마음에 와닿았다. 상품화를 시켜도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함께 가는 모습이 와닿았다.


치즈를 만드는 농가에서 구경을 한 후 주인인듯한 분이 나막신을 만드는 과정을 재연해 준다. 그러면서 왜 네덜란드에서 나막신을 신게 되었는지도 설명해 준다. 네덜란드라는 이름은 "해수면보다 낮은 땅"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바다보다 낮으니 툭하면 물이 차올라 생활에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저지대 땅은 물에 잠겨있으니 퍼내고 간척사업을 벌였다. 물을 퍼내기 위한 풍차도 생겼다. 살아가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오늘날 네덜란드를 상징한 것으로 바뀌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막신을 만드는 모습 속에서도 자신들의 선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모습이 보였다.


오늘날의 번영은 선조들의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로 만들어진 결과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로또의 행운은 아니며 무엇보다 선조들의 유지를 잘 받들어 남발하지 않고 주어진 몫을 아끼며 보존하고 가꾸는 모습은 더 배울만하다. 현재는 빌려 쓰는 미래에 불과하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내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나의 미래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작은 항구도시는 네덜란드가 대서양을 향해 나가던 항구였다. 화려했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범선이 많이 있었다. 마을 구경을 한 후 잠시 쉬던 중 새들이 다가왔다. 사람들과 익숙해졌는지 먹을 것을 주기 전엔 날아가지도 않는다. 우리새 모이를 사서 아이들의 배를 불려준 후에야 일어설 수 있었다. 새도 알뜰하게 제 밥을 챙길 줄 아니, 부자나라는 다르긴 다르다 싶다.



오후에 도착하여 시내 관광을 한다. 국립미술관과 반 고흐 미술관을 관람한 후 안네 프랑크 기념관을 들러보기로 했다. 이틀 일정이니 빠듯하지만, 암스테르담 역 주변에 거점을 정해 놓으면 나처럼 걸어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은 시내 구경을 웬만한 곳은 다 할 수 있다. 역 근처 암스테르담 담광장을 기점으로 왕궁도 있고 걸어서 국립미술관과 반 고흐 미술관 관람도 가능하다. 운하의 도시답게 도시 곳곳의 운하를 지나며 작고 아름다운 다리를 건너면서 높아야 사오층짜리 각양각색의 다양한 건물로 이어진 거리를 걷다 보면 시간이 모자란다.


고흐를 좋아하기에 꼭 와보고 싶었던 고흐 미술관이었다. 지금 2022년은 주변도 상당히 달라졌지만, 2005년에는 여느 도심 속의 미술관처럼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기념으로 들러가는, 소박한 미술관 느낌이었다. 이후 리모델링과 더불어 주변을 공원화해서 사람들이 문화도 즐기며 쉬어가는 녹지공간으로 만든 것이 인상적으로 보인다. 스키폴 공항에서도 고흐의 명작들을 응용한 많은 기념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인쇄한 전지 화보 한 장이 80유로에 판매될 정도로 암스테르담 관광에 고흐는 사후에도 기여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과 함께 네덜란드 3대 미술관중의 하나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미술관은 고흐가 평생 아끼며 사랑했던 동생 "테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가 소장하고 있던 고흐의 그림 700여 점과 자필 편지 등을 기증받아 1973년 개관했다. 고흐는 서른일곱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동생 테오마저 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 아내 "요한나 봉허"가 형제간에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내고 고흐의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고흐의 그림을 수집하고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테오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형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형을 사랑했다.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역시 부모의 뒤를 이어 삼촌 고흐의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알리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고 고흐 박물관의 설립을 구상하고 네덜란드 정부 주도로 설립된 "반 고흐 재단"에 상속받은 작품을 양도하고 재단은 "고흐 미술관"에 영구 임대하여 "반 고흐 미술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고흐의 짧고 강렬했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테오와의 형제애,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고흐 박물관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생전 불우했던 삶에서도 놓지 못했던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작품도 팔지 않았다. 물론 당시 그의 난해한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분위기도 있었으나 약값으로 단 한 점의 작품만 판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사랑하는 형을 위해 경제적인 뒷받침을 아끼지 않았던 동생과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 곳에서 그의 수많은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고흐 미술관은 이름답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흐의 작품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유명한 "아몬드 꽃(1888~1890)"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 " "해바라기" "씨 뿌리는 사람(1888)"들과 "자화상"등 주옥같은 명화를 여유를 가지고 눈앞에서 볼 수 있어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사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사랑받는 고흐는 그의 미술관에서 고뇌를 풀어낸 분신들과 함께 영원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맞이 할 것이다. 코로나가 종식된 후에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의 안식처 중 한 곳이다.

  

반 고흐 미술관(두산백과) / 당시 방문했던 반 고흐 미술관


까마귀가 나는 밀밭(구글 아트 앤 컬처)

감자를 먹는 사람들(구글 아트 앤 컬처)

아몬드 꽃(구글 아트 앤 컬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고흐 미술관과 가까운 곳에 있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아름다운 건물과 조경으로 인상 깊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네덜란드어 Rijksmuseum Amsterdam)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미술관의 하나로서 당시의 네덜란드 왕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하여 1808년에 창설되었다.(위키백과)


아름다운 건물 모습과 정원 조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으나, 기대했던 것은 미리 알고 간 대로 "램브란트"의 위대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빛의 화가로도 불리는 램브란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며 특히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생전에도 부귀와 존경을 받았지만, 말년에 파산선고를 받아 힘든 중에도 작품 활동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야경"은 당시 군인들의 야간 순찰을 그린 그림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압도적인 크기와 빛과 그림자의 적절한 대비(명암), 당시 군인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눈앞에서 본 "야경"의 크기와 작품의 묘사에 잠시 다른 것을 잊을 정도였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선 이 작품 하나만 봤어도 후회되지 않을 정도였다.


야경(나무 위키) / 가까이서 본 "야경", 빛의 표현이 신비로울 정도였다.


오후에 안네 프랑크 박물관을 찾았다. 실제 이 집은 나치 독일의 핍박을 피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안네 프랑크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살던 집이다. 안네 프랑크 재단이 집을 정비해 1960년 개관한 후 나치 정권의 학살에 관한 자료와 외부는 개조되어 당시의 모습은 없지만, 내부는 보존되어 안네 프랑크가 숨어 살던 생활상을 볼 수도 있다. 전쟁의 비참함과 두려움 속에서 일곱 명이 2년 동안 숨어 살았던 지붕 밑 45m 2의 좁은 공간에서 꿈도 희망도 놓지 않았던 어린 소녀, 일기를 쓰고 있는 안네 프랑크의 모습이 지금도 투영되는 듯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그만 표지판을 달아놓지 않았다면 이곳이 안네 프랭크 박물관 인지도 모를 정도로 소박해 보였으며 공식 명칭 역시 박물관보다는 안네 프랭크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보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유럽을 다니다 보면 유명인의 생가나 박물관도 그리 요란스럽지 않다. 자연스럽게 주변과 동화되어 튀지 않기에 더 호감을 느낀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삶을 살고 나와 같은 이웃이었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낀다. 뭐든 조금이라도 특별하다면 티를 내고 거창하게 포장을 해야 하는 문화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냥 두면 안 되는지,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때론 현실만에 안주해 무분별한 개발에 집중하는 현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자연도 환경도 그리고 역사도 우리에게 한편을 내어준 것이며, 우리 역시 이 순간들을 책임지고 함께하며 거쳐가는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싶다.


안네 프랑크 박물관 입구(위키백과) 2005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2005.10.16

좁은 호텔이었지만 달리 먹은 마음 덕에 이틀이 지나니 마주치는 얼굴들과도 일상의 대화로 친근감을 쌓아간다. 프런트에서 잠시 담소를 나눈 후 역 광장으로 나가 주변 산책을 했다. 오늘은 저녁에 출국해야 하기에 짐을 챙겨 프런트에 맡긴 후 시내 관광을 하고 스키폴 공항으로 갈 예정이다. 오전 11시 15분에 한 시간 운행하는 크루즈를 탔다.


배를 타고 암스테르담 곳곳, 가지처럼 이어져 있는 운하를 통해 도시를 돌아본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집들이 이어져있다. 집값이 비싸서인지 지을 데가 없어 그런지 운하 곳곳에는 보트 집도 많다. 보트에서 생활하고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 보트에 화분을 놓고 야채를 재배하기도 하며 강아지들을 키우기도 한다. 즐겁고 행복한 삶이 이어진다면, 땅 위에서나 물 위에서나 무엇이 막을 수 있을까. 저들에게는 이 운하가 땅이요, 밭이고 걸어 다니는 삶의 터전일 것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운하는 배 타고 다니는 골목길처럼 시내를 촘촘히 누비고 있다. 어제는 걸어서 구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 걸어 다녔던 길들을 배안에 앉아 올려다 걸었을 때 보지 못했던 또 다른 풍경이 보인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지만, 겪고 보고 느끼고 사는 나의 자세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안에서 보든지 밖에서 보든지 내가 택한 결과 일 뿐이고 결과에 순응하던지 응전하는지도 나의 의지에 달려있을 뿐이다.


우리는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담광장 주변을 한번 더 돌아본 후 암스테르담 역으로 가 3.5유로를 주고 한시에 출발하는 스키폴 공항행 기차표를 끊었다. 이틀 동안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보고 싶었던 그림들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스키폴 공항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공항에 일찍 나온 것은 긴 비행시간 때문에 복도석 자리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여기선 좌석까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 복도 자리가 이미 동나버렸다. 그래도 창가와 가운데 자리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휴식을 취하며 다시 찾아올 네덜란드를 내려다본다. 창가에는 성에가 맺혀있고, 멀리 어두운 하늘에는 덩그러니 둥근 아이가 하나 떠있다. 달이다. 비행기를 많이 타봤어도 저렇게 예쁘고 커다란 달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너무 환해 순간적으로 해인지 헷갈렸을 정도로... 구름 속, 하늘에 있는 지금 이 순간 이 비행기로 "저기 둥근 아이에게까지 날아가 볼순 없을까"는 달콤한 꿈도 잠시 가져본다.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던 여행길, 수고했다고 품어주듯 환하게 격려해주는 달빛 아래 피곤한 육신을 맡기며 긴 여행의 끝은 인천공항을 향해 날아간다.




여행후기


행복은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안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의지는 갈수록 자라나는 것을 배운다. 좋아하는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안네는 말하고 있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논어 옹야 편). 이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긴 어려웠다.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흐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나름 새로운 이해를 해보게 되었다. 고흐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생각했지만, 생전에 어떤 좋은 결과나 원하는 성취를 얻지 못했는데도 놓지 못한 것을 보면 좋아하는 것을 넘어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 사랑하고 즐기는 일이었기에 어떤 결과나 대가에 상관없이 몰입할 수 있었고, 결국은 작품 속에 세월을 넘어선 진심이 겨졌던 것이다.


 더 많이 알아가고 배우고 가지기 위한 노력보다는 할 수 있고 조금 아는 것이라도 제대로 맛보고 즐기는 발걸음부터 떼야하지 않겠냐는 애정 어린 충고가 가슴에 녹아 스며드는 저녁, 클레베와 쾰른 그리고 뒤셀도르프와 암스테르담에서의 바랬지만 향기로웠던 여정을 담아 본 소소한 글을 마무리한다.





쉰들러 리스트의 ost를 네덜란드 출신 바이얼리니스트 시모네 람스마(Simone Ramsma)의 연주로 들어 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qVRcFQag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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