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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Apr 25. 2022

지혜로운 한 마리의 개를 키워가는 힘

"편견"과 "선입견"을 제어하지 못하면 "꼴불견"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한다. 혹 사람들이 "개**" 하고 욕을 하면 "개 욕하지 말아요, 개는 안 그런 답니다"할 정도로, 반농담 반진담 표현을 던진다. 다행히 우리 가족 모두 개를 사랑한다. 어렸을 땐 마당에서 개를 키웠지만, 이제는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자식 같은 가족이다. 아니 자식이다. 개를 좋아하다 보니 보이는 개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개도 키우고 있다.


일전에 동남아 여행 갔을 때 가이드 분이 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 잘 알고 있는 세 마리의 개에 관한 얘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속에 키우고 있는 개,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두 마리의 개와 그 두 마리를 견제할 수 있는 지혜를 주는 개 "백문이 불여일견"의 "일견", 달리 표현한다면 지혜의 "명견"이다.


편견은 무엇인가? 차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편향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다. 무언가 자신이 확증하는 일에 치우쳐 인식이 그 방향으로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이라고 표현된다. 어딘지 모르게 편견과 선입견은 닮아 있지 않은가? 같은 견이라 그런가? 우선 느낌 드는 대로 부정적인 면이다. 물론 좋은 선입견이나 편견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선입견이 서는 자리는 "뭔가를 이미 결정해 버린 듯한" 고정적이고 강직된 느낌이다.


우리나라는 해방과 전쟁 이후, 초토화되었지만, 부모세대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위대한 나라다. 바야흐로 세계 10대 선진국으로  진입할 만큼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이뤄 왔을 뿐 만 아니라  "한류"라는 독특한 우리만 문화 예술 창조로 세계적으로 문화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모든 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발전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다.


동남아 지역은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요즘 여행은 동남아를 넘어 미주대륙과 유럽, 중남미로까지 확장되고 있지만, 아마도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가난한 나라라 생각한 "선입견"으로 여행지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한 사람들을 간혹 경험했던 것 같았다. 그는 동남아나 가난한 나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무시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했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도 짧은 시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룬 무언가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냄비근성이나 금방 식는 열정에 대한 아쉬움"도 (어쩌면 이것도 지금은 지나버린 "선입견"에 지나지 않을진 몰라도...) 있지 않은가는 말에 공감을 느꼈다.


각자의 울림이 있어야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럽의 문화는 두드러지게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마음을 달래주는 묵직한 울림이 있다. 물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대신할 순 없지만, 수백 년에 걸쳐 짓고 있는 건물들 아직도 진행 중일 사업들, 그들의 의식 속엔 한 번에 끝내고 만다는 생각보단 자신들 역시 영속적인 이어짐의 다리 역할에 불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모두"속의 "일원"에 불과하며 결국은 지나가는 과정을 거쳐가는 "모두 속의 하나"에 속한 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한다면 누구에게라도, 자연 속의 어떤 대상에게라도 조금은 더 겸손해지고 편견과 선입견 없는 "순수함" 그 자체로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각 개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더 가졌고 못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풍조가 만연한 작금의 세태를 보면, 보이는 것의 풍요가 마치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투영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기를 쓰고 더 가지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곳곳에 있다. 경제적인 부유함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한 "선입견"과 외관을 보고 사람을 평해버리는 "편견"의 위력은 충분히 겪어보기 전엔 무엇으로도 평가하지 말라는 "명견"의 충고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상(日常)에서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잠시 숨을 고르고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많다. 성질 급한 "편견"과 "선입견"이 먼저 짖어대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개는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먹을 것도 잘 주고 관심을 더 줘 잘 자라게 한다. 더 자주 불러내고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개에 눌려 방치된 한 마리의 개는 잘 키워야 하지만, 무시하고 버려두기 십상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명견"으로 물리치고, 내가 대단한 만큼 다른 사람도 대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줘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내 안의 또 다른 개가 꿈틀거릴 수도 있다. 

요즘 더 드세게 자라고 있는 "꼴불견"이다. 

"편견"과"선입견"을 넘어설 수 있는 과감한 "꼴불견"이다. 

"편견"과 "선입견"과 "꼴불견"이 대립하여 성장한다면 "명견"은 당연히 꼬리를 내려버릴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 어떤 일들이 교묘하게 다가올지 모르는 인생길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내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내 보내야만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명견"이 지켜 줄 것이고, "꼴불견"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각자의 마음속에서 키우고 있는 "명견"에게 순간마다 지혜로 먹이를 주고 배려와 인내로 키워 진정한 "명견(明見)"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인생 면역력이다.






올해 첫 목단이 피어난 날 아침, 산책 후 쉬고 있는 강아지들

목단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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