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에도 봄비가 내렸다. 햇살은 따뜻하지만, 바람은 서늘한 아침, 일찍 떠진 눈으로 마당에 나가 본다. 아침 마당을 훑어보며 하룻밤에도 달라질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 작은 취미로 자리 잡았나 보다.
길냥이는 밤에 채워준 먹이를 깨끗이 치워놓고 갔다. 이 아이는 언제 왔다 가는지는 몰라도 꼭 온다. 그러니 한 끼라도 밥그릇을 채워주지 않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다.
서부해당하는 이주일 째 빨간 꽃 몽우리를 매달고 있었는데 아침에 나와보니 꽃이 피었다. 분홍꽃을 주렁주렁, 마치 분홍 열매를 달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게 피었다. 화이트셀렉스는 연두 아기 잎은 훌쩍 컸다.
지난주 새로 들여온 노랑 미 산딸나무는, 멀리 거제도에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심은 다음날부터 꽃 몽우리를 벌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활짝 벌어져 알알이 노란 속살이 보인다. 이번 주엔 노란 얼굴로 환하게 웃을 것 같다. 앞 정원의 붉은 산딸나무도 겨우내 품었던 꽃몽우리를 벌려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 머잖아 홍조 띤 얼굴을 볼 듯 싶다.
뒷마당 쪽엔 팥꽃나무가 보라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만나고 싶었던 박대기 꽃은 꽃분홍색 자태를 한껏 뽐내며 몽우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라면 너무나 화려하고 촌스럽다고 까지 할 그런 분홍색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예뻐도 너무 예쁘다. 노랗고 분홍 꽃 잔치, 건너편엔 점잖고 고고하기까지 한 진달해의 연분홍 자태, 막 잎이 터지는 나무들의 여린 연둣빛 신록은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라도 하듯, 본 적도 없는 색으로 눈과 마음을 감동시킨다.
예쁘다. 정말 예쁘다. 온갖 요란한 원색들이 섞여 있는데도 촌스럽지 않고 우아하다. "대지"라는 캔버스 위에 자연 화가는 원색의 우아함을 이렇게 멋지게 묘사할 수 있다. 유명화가나 디자이너라도 제대로 소화시키기 어려운 강렬한 색의 하모니를 나의 조촐한 마당에선 자유롭게 볼 수 있으니 축복이다.
누가 시켜서 할 일도 아니고, 시켜 될 일도 아니었다. 각자 난바 대로, 특성대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표출했을 뿐인데 다름 속의 묘한 어울림이, 이리도 아름다울 줄 몰랐다. 사계절을 꼬박 지내다 보니 마당에서의 삶은 모두 좋지만, 그래도 4~5월이 가장 아름답고 호사스럽게까지 자연의 신비함을 온몸으로 누릴 수 있는 때인 것 같다. 이제부터 5월까지 신록이 녹음이 되기 전까지 나는 이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비록 넓진 않지만 흙을 밟고 살지 않았다면 못 느꼈을 행복이 아니겠는가.
뒷마당 쪽의 자목련, 제 몸뚱이보다 더 큰 꽃몽우리를 아홉 개나 품고 있다가 새에게 뜯기기도 하고 지난 주말에 핀 건지 터진 건지(사실 얘들의 모양을 보면 피었다는 표현보단 터져버렸다는 말이 맞다), 커다란 꽃잎들이 처절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연둣빛 잎들이 지고 난 꽃 위로 올라와 위로로 덮는다. 꽃이 지고 잎이 나, 새로운 목련나무를 키워간다. 힘들게 피었지만, 태어남과 떨어짐과 또다시 이어짐이야 말로, 삶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느 것도 염려할 필요 없다는 자연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다.
몇 달 전부터 뒷마당 텃밭 쪽에 새들에게 모이를 주기 시작했다. 테크 담장 옆에 꽃피는 봄, 살구나무와 산수유꽃 보며 앉아 차 마시며 찻잔을 놓아둔 곳이었다. 긴 판자에 오래된 현미를 조금씩 놓다 보니 아침이면 새들이 기다리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모이를 주고 손을 내밀어도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모이를 주고 가면 어느새 먹고 갈 뿐이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다 보니 이제는 아예 기다리는 눈치다. 이전에는 나무 위의 새들이 테크로 걸어가면 도망갔는데 지금은 도망가지 않는다. 모이를 주고 들어와 작은 방창 문에서 보면 사이좋게 먹고 날아가 버린다. 각자 자기들의 일터로 가는지 식사했으니 쉬러 갔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 밥을 주기 시작하다 보니 이것도 얽매이게 된다. 안 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인간이 아무리 습관의 동물이라지만, 이런 습관까지 옭아맬 줄은 몰랐다. 아침이면 새 모이에, 저녁이면 길냥이 밥을 챙기는 것도 스스로 옭아맨 새로운 일정이 돼버리고 말았다.
결국 내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인지 모른다. 얘들한테 빚진 것도 없는데? 졸지에 아침마다 공양해주게 된 것이다. 그래도 자연의 일원으로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우리 집 맞은편 이웃은 너무 좋다고 한다. 아침마다 꽃나무 사이에서 새들이 지저귀며 노는 모습을 온전히 집안에서 볼 수 있으니 좋다는 것이다. 뭐 이웃이라도 좋아하신다니 다행이다.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겪어가는 즐거움이다. 봄이면 움츠렸던 새 생명이 온 마당을 뒤덮듯이 새들과 길냥이도 더 바쁘다. 아이들의 공양꾼이 되었지만, 초목처럼 뭔가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봄의 일원이 된 것도 같아 마음은 풍족하다.
노랑 목련은 습자지 같이 얇고 투명한 몸뚱이를 피웠다. 몇 주간을 참고 버티더니 드디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나무가 꽃몽우리를 내고 품고 있는 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기를 기다리는 동물들과도 같다. 마지막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새 생명을 맞이 할 수 있는 인간처럼 꽃도 나무도 마지막 몽우리를 열고 꽃을 펴내는 순간이 가장 힘들고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노랑 목련이나 미산딸 나무도 그 순간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때로 빛나는 순간이 있기 전, 찾아오는 마지막 순간의 고통은 참기 힘들 때도 많다. 결국 참지 못해 놓아 흘려보내기도 한다. 바로 그 순간만 참았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순간을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놓아버린 순간은 흘려보내고 또다시 찾아 올 빛날 순간을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일상이기도 하다. 모질게도 추운 겨울에서 보면 봄이란 영영 찾아올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견뎌본 만물은 그 겨울을 디뎌야만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깊은 땅 속에서도, 숨 한 번으로도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다. 반드시 찾아 올 이 봄을 위하여.
흙을 밟고 살면, 사람뿐만 아니라 보이는 모든 것에 눈길을 보내며 대화하고 거둬야 하며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그냥 둘 수 없는 관계가 돤다는 것을 배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 온전히 헌신해 주고 있는 일방적인 관계를 경험하고 산다. 이 봄, 온 마당은 형형색색으로 물든 몸을 움직이며, 오늘도 앞을 향해 나가라고, 마당과 하늘과 바람으로 온몸으로 생명의 붐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