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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May 25. 2022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물러나 보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마당 돌담 사이로 흘러내리는 흙을 방지하기 위해 꽃잔디를 심었다. 봄이면 아이들의 말대로 온 마당이 "분홍 분홍"이다 할 정도로 진분홍의 언덕을 만들어줬다. 추운 겨울도 잘 견디고, 누렇게 마르고 뜬 잎도 봄이면 진분홍 꽃을 피우며 마당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올해는 돌담 사이의 꽃잔디가 잘 나지 않았다. 목단도 진달래진지 오래고, 매발톱도 엄동설한을 이기고, 제 꽃을 피워내건만, 백합도 튼튼한 기둥을 세워가고 있건만 꽃잔디는 작년 같지 않다.

 

"아무래도 죽은 듯싶어"

"아니야 쟤들은 저래도 살아 나와 더 두고 봐야 해"

지인들의 말대로 한 달 이상을 두고 보았다. 그러고 보니, 더러 나오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아침에 강아지들 산책 후,  눈에 밟혀 가위를 들고 돌담 사이 죽어 보이는 꽃잔디를 헤쳐본다.

정말 죽었다. 힘없이 뽑혀 나오는 것도 있었다. 살아있는 꽃잔디는 제법 따가울 정도로 뾰족하다. 마른 것들 중에서도 뿌리조차 죽어버린 것은 힘없이 뽑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살았네?"

더러 죽은 아이들 속에서 눌려 초록색 몸뚱이를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한 아이들이 보였다. 죽은 꽃잔디의 잔해에 눌려, 산 생명들도 제대로 숨 트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 얘들도 꼭 같구나..."

물이 아래로 흐르듯, 한 번씩 폭우가 쏟아지면  말라있던 강, 고인물휘몰아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가듯, 살만큼 산 아이들은 새로 자라날 아이들을 위해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자연의 모든 흐름은 이 규칙을 지키기 때문에 순환되며,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 우리 세대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꽃잔디는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제 몸뚱이라도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 안에 갇혀 살기에 어쩌면 나를 바라고 있었건만, 게으른 나는 내 생각 속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아이들을 걷어내고 잘라내니, 속에 있는 아이들이 숨을 제대로 쉴 것 같다. 사실 죽은 아이도 새로 올라오는 아이도 이미 한 몸이었다. 밀알이 썩어야 싹이 나온다는 교훈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삶 자체가 생과 사의 흐름 속에 이어져 있는 듯이 자연 속에는 역행이나 순행이나 뒤섞이어 하나로 이어져 갈 뿐이다.


죽은 몸으로도 당당히 버티고 사는 이들도 있다. 물론 보이는 육신은 온갖 것으로 치장되어 건장하기 이를 데 없지만, 속으로는 자신조차 감당 못할 욕심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 적당한 선이 있으면 좋으련만 물러남을 경험해보지 못한 내려놓음이 없는 이기적인 삶의 연속이다. 

"물러 날 때"를 강제한 것이 어쩌면 은퇴 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퇴"가 없는 일들이다. 객관적인 은퇴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꽃잔디처럼 한번 걷어내고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은퇴가 없는 직업을 선호한다. "평생"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생"이 처음 시작할 때처럼 온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은 가져봐야 할 것 같다. 물론 평생의 사명으로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객관적인 은퇴가 없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모로 사회를 쥐고 흔들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꽃잔디처럼 그런 분들도 은퇴를 한 번씩 경험해 보면 좋겠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맑은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말이다. 찾아오고야 말 은퇴가 새로운 시작을 보내줄 것을 기대하며 죽은 꽃잔디를 걷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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