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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Aug 29. 2022

쓸모없는 것은 없다. 쓸데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쓸모없이 태어난 게 많아 보이는 곳이 마당이다.

특히 예쁜 나무나 꽃들 사이에서 제 뿌리를 뻗치고 나가는 잡초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그래도 "쓸모없이 태어난 것이 어디 있으랴"를 배우게 되는 곳, 또한 마당이기도 하다.

생명 있는 온갖 것들이 태어난바대로 제 성정을 펼치는 곳, 다양한 삶의 향연을 펼치는 곳이다.

뽑아내도 잘라내도 돌아보면 다시 비집고 나오는 생명의 줄들이 이어진다.


생명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유일한 것이기에 인간의 생각과 한계를 넘어선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생명들의 "쓸모"가 뽑아버리는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 이것 또한 자연의 역할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위로받는다.

마당 구석구석에 있는 잡초들이나 채마밭을 헤집다 보면 보이는 미물들,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배운 후로는 흙으로 다시 덮어버린다.

아직도 남아있는 배롱나무의 마지막 꽃잎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벌들도 자연이기에 가능하다.

변화하는 세월의 혹독함 속에서도 생명은 이어져 봄이면 여름이면 제 몫을 다시 해낸다.


그러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가르침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주인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다.

생명의 성장과 소멸은 인간 능력의 한계 밖이니, 자연 앞에서 겸손함을 배우지 못한다면 땅을 밟고 사는 생활의 의미가 없다 싶다.

잡초는 왜 나오나 싶지만 잡초가 있기에 잔디가 돋보이고 잡초가 있기에 내 손길을 또 요구한다.

데크 틈새를 비집고 나와 기어이 꽃을 피우고 마는 이름 모를 들꽃도 생명의 이어짐을 고통 속에도 보여준다.

자연 속 생명들의 "공생(共生, symbiosis)", 아니 "공생공사( 共生共死)"를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었다면 저모진 환경 속에서도 제 몫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너무도 힘든 세상이라 차라리 잠자듯 고요하게 흘려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역량으로 "쓸모"를 생각하며 불멸의 밤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자연 속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생명들은 기어코 제 몫을 해낸다.

태생부터 다져진 단 한 가지, 생명은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기억할 뿐이다.

마당을 가꾸면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얻게 된다.  "쓸데없는" "무가치한" 생각은 흙속에서, 흙을 디디고 사는 생명들과는 상관없는 한탄에 불과함을 배우게  된다. 자연의 일부가 될 마음만 가지면 자연은 언제라도 동화( 同化)되어 주기 때문이다.


돌 틈 사이 풀 하나, 잡초 하나 보면서 생명의 숭고한 힘을 깨닫는 하루가 된다.

막 고개를 드는 여린 배추들이나, 잔디와 풀들 이슬 머금은 나뭇잎들까지 오늘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어느새 가을로 접어든 계절 마당은 또다시 다가 올 세월을 몸으로 준비하고 있다.

새까맣게 진을 치고 앉아 있던 전깃줄의 제비들이 오늘 아침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저녁 며칠 쌀쌀해진 사이, 요란했던 여름을 뒤로하고 강남을 향해 떠났나 보다.

석별을 아쉬워하기보단 제 몫의 순응은 내년에 반가움으로 다시 찾아들 것이다.

남아있는 내게 하루의 도전(挑戰)을 쓸데 있는 응전(應戰)으로 이겨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쓸모없다 - 쓸만한 가치가 없다

쓸데없다 - 아무런 쓸모나 득이 될 것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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