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지인들과 영월장을 다녀왔다. 동강으로 귀에 익숙한 영월이었지만, 가보진 못했는데 마침 어제가 장날이라 내친김에 아침 일찍 갔다 오기로 했다. 영월은 충북과 접해 있는 강원도인지라 강원도 느낌보단 충청북도 느낌도 많이 났다. 초록의 동강은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며 흘러가고 나무들은 여린 초록잎들을 내 보이며 더러 피어난 꽃나무들은 포근한 봄의 정취를 사방으로 펼쳐 마치 다른 세상에라도 온듯한 느낌을 주었다.
동강 강변 둑으로 길게 펼쳐진 천막아래 온갖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따뜻한 날씨에 가족들과 마실 나온 인파로 오일장은 내내 북적거렸다. 우리는 즐겁게 구경도 하고 각자 필요한 것들을 사며 전통시장의 풍경을 즐겼다. 봄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곳은 역시 장날의 꽃 묘목시장이었다. 블루베리, 남천, 홍도화, 감나무, 밤나무 각종 묘목과 아울러 많은 꽃들도 팔고 있었다. 어떻게 이 많은 꽃화분들을 싣고 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화분들과 모종들은 넓게 펼쳐져 사람들의 봄을 환영하고 있었다. 백합과 수선화, 글라디올러스, 카라 여러 종류의 구근은 물론 야생화들, 다육이도 팔고 있었다. 흥미롭게 본 후 나는 흰색과 분홍색의 미니장미 두 개와 봉오리가 맺힌 나리꽃과 겹백합 구근 3개를 샀다.
늦게 돌아와 앞마당에 미니 장미와 나리를 심은 후 다른 장소를 찾아 겹 백합을 하나씩 따로 심었다. 백합은 이파리도 많고 키도 아주 크기 때문에 심을 때 앞쪽보단 뒷 쪽이 좋다. 그러면서도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좋다.
겨울을 이긴 수선화가 먼저 꽃을 피우면 튤립은 꽃대를 올리기 시작한다. 튤립도 일 이 주 꽃을 보인 후 짧은 생을 마감하면 푸르던 잎은 누렇게 될 때까지 꽃을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별로 이쁘지 않은 모습으로 늙어 갈 것이다. 백합은 향도 좋고 꽃도 아름답지만, 피우기까지 공이 많이 든다. 몇 달을 꽃대를 키우고 꽃봉오리를 키워 가며 키가 훌쩍 큰다. 6월 꽃을 보고 난 후에 누렇게 말라가는 모습 역시 별로 예쁘진 않다.
봄이면 부지런히 심지만, 사실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잠깐이다. 꽃은 자연의 청춘이다. 인생의 청춘만큼 아름답고 활기참을 주는 것은 자연도 마찬가지기에 짧은 기간의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들은, 꽃을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그 잠깐이 지나면 여기저기 심었던 것들의 변모하는 모습도 감당해야 한다.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한 꽃구경을 위해 자라고 죽어가는 모든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굵고 커다란 꽃대는 작대기처럼 튼튼히 박혀 쉬 뽑아지지도 않는다. 처음엔 꽃이 떨어지고 난 후 지저분해지는 잎들과 꽃대를 잘라 버렸지만, 잎을 그대로 둬야 광합성작용을 통해 구근이 알차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늦가을까지 그대로 두기 시작했다. 마당 곳곳에서 누런 기둥은 당당하게 자리 잡고 말라가지만 그 모습도 자연의 일부라 받아들이니, 확실히 다음 해 백합도 싱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느 꽃이나 나무들처럼 구근류들도 길어야 몇 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을 바친다. 잎이 올라오고 꽃대를 올리고 꽃이 지고 나면 제 몸을 바쳐가며 구근을 살찌운다. 우리 눈에야 그저 꽃에 불과하지만, 그 꽃을 만들어내려고 일 년 내내 일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꽃화분이나 생화를 사서 즐기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기도 하지만, 땅을 밟고 사는 삶을 선택한 자에겐, 결실을 보는 순간보단 자라며 사라져 가는 순간들의 이음을 통해 연결되는 삶의 교훈을 얻게 되니 감사할 따름이다.
인생에서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과 동기의 소중함이 더 빛나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내가 이렇게 꽃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몰랐다. 아파트에 살 때도 화분 몇 개씩을 두고 살 긴 했지만, 도시인처럼 살 뿐이었다. 흙을 밟고 마당을 가꾸면서 시간의 흐름을 배우고 순응을 배우며 내려놓으며 채워지는 작은 철학자의 삶을 배워가지만, 한편으론 가꿀수록 더 가꾸게 되는 욕심 아닌 욕심에도 익숙해져 간다.
매사가 그렇지만 애정과 관심을 기울일수록 마당도 달라진다. 잠시라도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쉴라 치면 저쪽에 잔디가 올라오는 것이 보이고 여린 잡초싹도 보인다. 일어나 뽑는다. 다시 앉지만 이번엔 바로 앞에 잡초가 보인다. 여린 풀들은 지금 뽑아버리는 게 좋다고 뽑는다. 정원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멍 때리기도 하고 싶어 가꾸지만, 가꾸면 가꿀수록 더 가꿀 곳이 눈에 뜨인다.
바쁘게 지낼 땐 심기만 하고 잘 돌보진 못했다. 이웃들이 우리 집을 "그대로 정원"이라고 할 정도로 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잡초도 많은 정원이었고, "살려고 나온 아이들을 뽑아버리는 것도 매몰차지 않냐"면서 심기만 하고 그냥 자라도록 두었다. 그러다 작년부터 마당에 정성을 기울였더니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공들인 만큼 표 나는 것이다. 길 가다 눈에 보이는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민 마당 있는 집을 본다면 이면에 얼마나 정성과 시간을 들였을까 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우아하게 호수를 떠 다니는 백조지만 끓임 없이 움직이는 발의 피로를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을 접하고 살면서 욕심이 줄어들고 내려놓는 것도 배우지만, 인간의 본성을 쉬 바꿀 순 없나 보다. 가꾸다 보니 더 가꾸게 되고 자꾸만 뭐를 해야 한다는 욕심도 아울러 생기게 된다. 마당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씩 좁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 더 넓었다면 " 이것도 저것도..." 아마도 온갖 욕심의 산물들로 채워 갈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다. 나의 작은 정원이, 자연이 주고자 한 본래의 가르침이 퇴색되는 욕심의 본산(本山)으로 키워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계속 가꿔야 하는 욕심으로 자라나지 않도록 해야겠다. 제대로 잘 꾸민 전원주택의 틀은 갖추지 못한 집이라 군데군데 정리해야 할 곳이 많지만, 적당히 선을 그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 정원으로 옮겨 심은 진달래나무에서 진한 분홍몽우리가 막 터지려 한다. 얼마나 예쁜 분홍색인지 모른다. 소박한 진달래 꽃은 몇십 년 동안 아니 몇 백 년 전에도 이 빛깔이었을까? 진달래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을 내어 보여 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색이 무슨 색인지 모를지도 모른다. 지금 저 분홍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일 년을 놓치고 마는 것이니, 자연 속 있는 그대로 찬찬히 교감하는 법을 배워가야겠다.
마당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는 모양 그대로 아름답다. 초록의 생명으로 올라오는 여린 싹들, 제모습을 마냥 내어 보이는 소박한 꽃 들, 지친 심신을 그대로 내려놓는 낙엽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은 어울리고 조화롭다.
"그래!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이 더 중요해..."
보는 눈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살아 있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마음마당을 품고 있었음이 감사하다. 밟고 다니는 소중한 마당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갖 생명이 어울리고 향기를 뽐내는 마당이 소중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내게 마음마당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제부터라도 보살피는 것 이상으로 마음마당의 성장을 위해서 보고 즐기며 공유하는 순간을 더 많이 가지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