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테크 쪽에서 '아아앙'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아기 고양이가 장미밭쪽의 틈새 공간에 끼어 있었다.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으면서 앙앙대고 있는 것이었다. 셀리가 보고 달려가려니 하악거리면서 사납게 반응한다. 샐리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씻겨놓고 나와 아기 고양이를 구하기로 했다. 고양이를 꺼내려니 계속 사납게 방어를 한다. 할 수 없이 '어떻게든 제가 있던 곳으로 가겠지' 두고 나왔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시간이 지나 다시 가보니 데크 쪽 틈새를 막아놓은 철망 속으로 목이 끼어 있었다. 앙앙거리는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저렇게 두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장으로 잘랐다. 막 나기 시작하는 이빨로 앙앙거리는 녀석은 한 손에 폭 들어오는 아기였다. 다른 데크아래에 놓고 물과 먹을 것을 가지러 갔는데 '아앙'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냥아 ~ 여기 물과 맘마 있어~나와서 먹어'
물과 불린 사료를 놔두고 들어 왔다. 삼색이 새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피부에 노란색이 섞여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제 엄마 찾아온 것인가? 어떻게 그곳에 끼여 있었을까?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았으나 길고양이 아닌가? 어딘들 가지도 오지도 못할 곳이 없을 것이다.
잠시 후 나가보니 사료가 비어있었다. 데크아래를 보며 야옹 불러봐도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왔다 갔다 하던 깜냥이가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살고 죽는 것도 지 운명이다. 아마 살았을 거야 ~ ' 어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들었지만 스스로를 다독였다.
재회
저녁 시간이 다가와 고양이들 밥주려 나와보니 삼색이가 아까 본 아기고양이와 함께 놀고 있었다. 물론 아기냥이는 나를 보자마자 돌틈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반가웠다.
'역시 삼색이 너의 아기였구나.
그런데 어떻게 아기 혼자 다니게 뒀니?'
밥을 줄 때 안을 때 불은 젖가슴을 보며 어디선가 몸을 풀었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새끼에게 젖먹이는 삼색이를 보니 왜 그렇게 말랐는지, 잘 먹고도 더 달라고 앙앙거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도 태어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아기냥이임에도 임신을 하고 어디선가 새끼를 낳고 지금까지 보호하면서 키웠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하고 더 잘 챙겨주지 못한 듯 해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마당생활을 하면서 나의 관점으로만 봐왔던 세계를 자연의 관점 다른 이들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더 많이 배워간다. 어린 생명이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은 없어야 하건만 자연, 생태계의 관점에서는 그것 또한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둬야 할 수밖에 없다. 삼색이와 깜냥이 그리고 콧털이도 작년 겨울에 저런 아기냥이의 모습으로 어미 깜이와 함께 우리 집에 들어왔다.
수컷인 코털이 와 깜냥이는 각자의 방식대로 들락거리며 살고 있다. 삼색이는 암컷이라 임신까지 한 것이고, 제 어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새끼를 몇 마리나 낳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모성본능으로 삼색이는 제 몸을 바쳐가며 새끼들을 키우다가 이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만약에라도 삼색이 새끼까지 입성한다면 어째야 하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식구들과 얘기하다 보니 이미'새끼 냥이들이 이미 집안 어디엔가 들어온 것은 아닐까?'한다. '설마??'
그런데 어제 오후 창문으로 삼색이와 검은 반점이 있는 아기, 또 다른 까만 아이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아이들도 데려온 것일까?'
'아님 엄마 따라온 것일까?'
삼색이와 장난치면서 젖을 먹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다들 살금살금 조심해서 창문으로 사진도 찍고 구경을 하다 아기냥이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아기냥이는 돌담 쪽을 도망쳤다. 문을 열고 나와 삼색이에게 물어봤다.
'삼색아 너 아기들이니? 도대체 몇 마리나 낳았어?'
제법 대담해진 삼색이는 우리를 봐도 피하지 않고 야옹거리며 드러누워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인가?'
'어미가 가는 밥집을 따라온 것인가?'
각자의 질문이 다르지만 답을 알 순 없고, 아침저녁 식사 때는 여전히 삼색이와 깜냥이 콧털이가 와서 먹는다.
며칠 전에 만난 분홍코의 노란 털이 섞인 앙칼 맞은 아기와 오후에 본 두 마리 현재 세 마리인데 이 아이들에게 우리 집이 자신들의 밥집이 되어 버린 듯하다.
삼색이와 아기냥이 네 마리
비 온 다음날이라 풀이 잘 뽑힌다. 이른 아침에 장마로 소복이 자란 큰 풀을 뽑아내고 잔디를 깎는다. 새벽부터 밥 달라고 찾아온 (데크에서 잔 아이도 있다) 길냥이 삼 남매는 잔디 깎는 기계소리도 아랑곳 않고 데크에 버젓이 누워서 아침밥을 기다리는 듯하다. 깔끔해진 마당을 정리하고 길냥이들 밥을 챙긴다. 새끼들을 본 후 삼색이 밥에는 냥이 통조림을 더 넣는다. 아침을 치운 후 쉬려는데 뒷마당데크 위에서 새로운 광경을 목격했다.'이리 와봐 ~ 삼색이 새끼가 네 마리네~'
삼색이가 드러누워있고 네 마리의 아기냥이들이 젖을 물고 있다.
'세상에 네 마리나 낳았나 봐!!'
한 두 마리씩 데리고 왔다가 아예 네 마리를 다 데리고 온 것이다.
까칠하고 영악했던 삼색이가 이젠 이 집이 제집이라 생각했는지, 안전하다 생각했는지 작정하고 새끼들을 다 데리고 온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미 왔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숨어 지내다 아예 드러낸 것인지...
아기냥이들은 어미 곁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도 친다. 생명이 이어지는 신비는 신기하다. 인간의 사고로는 백 프로 이해받기 힘든 점도 많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린 아기들은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식구들은 아기냥이들의 재롱을 바라보면서 이구동성으로 '귀여워'를 외치면서도'얘들이 아예 눌러앉으면 어쩌지?'똑같이 염려를 한다.
그건 그때 가서...
삼색이는 모성이 무언지도 삶이 무언지도 모를지 모른다. 천성이 그리할 수밖에 없어 주어진 길냥이의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고, 돌보는 인간 역시 내칠 수 없는 마음에 나누고 보살펴 주는 것이다. 자연계, 생태계는 잘나고 강한 종족만 버텨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냥이들을 돌 봐주면서 냥이 삶을 생각해 보면 불쌍하다는 마음이 많이 든다. 하지만 마당을 가꾸면서 여러 가지가 어울려만 이뤄지는 정경을 보게 된다. 밝은 곳이 있으면 그늘도 있고, 열매를 얻는 것도 있지만 낙엽으로 떠나는 것들도 마당의 구성원임을 보게 된다.
그러니 집안에 들어온 길냥이들을 그대로 내치긴 힘들 것 같다. 새끼들이 자라면 나갈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저 우리 집은 밥집에 불과한 곳이라 생각토록 해야 한다. 다만 삼색이(의심된다)가 요즘 잔디에서 볼일을 계속 보는 바람에 야단도 치고 하지만, 알아듣기나 할까... 치우고 식초물 뿌리면서, 이런저런 조치를 하다 보니 좀 더 힘이 들 긴 한다.
생명이 있기에 세상은 이어져 왔다. 생태계 자체의 이어짐과 순환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은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 생태계의 영역까지도 넘나들려 하고 있지만, 생명의 신비에는 아직 접근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어디선가 과학의 이름으로 신의 영역까지의 접근을 시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생명의 잉태와 출산과 자라남과 사그라짐의 영역은 엄연한 신의 영역이다.
안타깝지만 원치 않게 사라지는 어린 생명들도 많을 열악한 환경에서도 길냥이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천성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은 타고난 생존력과 적응력이 있기 때문이지만, 돌보는 많은 이들의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길냥이가 적응해서 살아가는 힘이나 불쌍히 여겨 돌보도록 드는 마음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 나누고 베풀어야 함도 필요함을 깨닫도록 주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집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한 끼 대접하면서,
그저 우리 집은 몇몇 길냥이들에게 맛있는 밥을 제공해 주는 밥집...
나그네의 주막 같은 곳이면 좋겠다.
아예 눌러살려고 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급한 성정이 많이 누그러졌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열어간다.
식사 후 여유로운 삼색이
창문에서 눈이 마주친 삼색이... 뭐라 말하는 듯하다. '죄송해요 ~인지 안녕하세요~' 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