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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Feb 20. 2024

비 오는 날, 반려동물에 대한 단상(斷想)

하나. 깜냥이

며칠 전 아침 주며 보니, 깜냥이의 배가 유난히 부르다는 것을 느꼈다. 혹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배가 왜 저리 부르지? 깜냥이는 워낙 까칠해서 만져주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밥 먹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꼭 임신한 것 같았다. "쟤는 수놈인데?" 작년 일 년 동안 정원일기의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의 대표적 생명체였던 깜냥이, 소년 깜냥이였는데...

뒤를 보며 폰으로 몇 번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확대해 보며 아무리 찾아도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그러면 깜냥이는 수놈???"

솜이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인 것처럼, 깜냥이도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었단 말인가?

내가 잘못 봤단 말인가?  깜냥이는 장난도 잘 치며 유난히 활달하게 애교도 많이 피웠다. 나의 고정관념이 문제였나? 동물의 세계에선 수컷이 더 예쁘고 애교도 많이 부린다고 했는데...

"고양이란 녀석이 요물이라 왔다 갔다 하는지도 몰라~"하니  옆에서 "사진으로 증명되었는데?" 한다. 백번 나의 착각이었음이 입증되고 말았다.  

"깜냥이는 임신 중이었던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은 겨울, 삼색이가 임신할 것 같아(요새 배도 부르니 혹 모르겠다), 걱정했는데... 깜냥이가 확실하게 임신한 것이다. 들락거리고 있으니 제가 편할 장소에 몸을 풀 곳을 마련해 놓았는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누군가! 냥이들 아닌가. 미니 온실 안에도 길냥이집을 놔뒀으니 어쩌면 그곳을 이용할지도 모르겠다. 길냥이들 기숙에 2년 정도를 보내고 나니 나름 여유도 생긴다. 새끼를 데리고 오면 역시 "그건 그때 생각키로 하자!" 담담하게 생각한다.


둘. 삼색이, 깜냥이, 솜이

이른 아침 현관 앞에선 냥이합창이 한창이다. 삼색이의 아리아 "야~~~ 옹" 깜냥이의 "야옹" 그리고 솜이의 "야옹야옹냐옹" 밥 주세요 송이다. 부지런히 아침밥을 준비해 나눠준다.

다른 작가님 얘기를 보면 길냥이들 식사 때도 싸우는 경우가 있다는데 우리 집 길냥이들은 사이가 참 좋다. 눈치가 빨라 싸우면 혼날 것을 알아서인지, 제 밥그릇 앞에서 감사히 먹는다. 간혹 솜이가 제 밥 남기도도 남의 밥을 탐내도 삼색이나 깜냥이가 화내지 않는다. 덩치는 저희만 해도 아직 아기란 것을 아는 것처럼...

삼색이 깜냥이 솜이 가족은 삼색이와 깜냥이가 형제, 솜이는 삼색이의 아들이니 엄마와 외삼촌과 조카사이다.

길냥이 세계에서 족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얘들은 우리 집에서 태어나 자라고 들낙 거린 아이들이다 보니 오히려 우리가 따지면서 보살피는 편이 된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만사를 제 편에서 생각한다는 것을 길냥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어째도 상관없다는 같은 표정 속의 다양한 추임새로 제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밥만 잘 먹고 따숩게 자고 쉴 수 있는 곳만 제공해 준다면 적당한 애교쯤이야 하는 것 같다. 마당에서 산책할 때도 어디선가 달려와선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하며 만져 달라는 애교를 피운다. 걷다 말고는 잠시 앉아 보드라운 솜털을 조몰락거리면 아직 채 여울지도 않은 듯한 하얀 이빨로 살짝 들이댄다. 주인을 사랑하는 애정의 표시리라 여기며 흐뭇한 마음에 기분 좋기도 했지만 고양이의 특성을 조금 알게 된 요즘은 "아니 ~ 네가 나를 데리고 노는구나! 그래~너도 즐기려무나" 내 손도 내어준다. 위주로 사는 것은 고양이나 사람이나 다름없다. 움직이는 생명들은 부동의 생명체보다 이기적인 법이니까...


셋. 삼색이 아들 솜이

하루종일 내리는 비에 아침 먹고 마실 나가던 솜이 모자는 집에서 꼼짝 않는다. 이리저리 둘이 부대 까며 뒹굴기도 좁은 온실집안에서 너스레 비구경을 하며 낮잠을 즐긴다.

문밖에 나올 때마다 누워있는 모습이 재밌어 사진을 찍어보니 포즈가 다양하다.

고개를 포갰다가 등으로 기댔다가 이쪽저쪽으로 다양하게 움직이며 자다 깨면서 그래도 솜이는 "야옹" 인사는 잊지 않는다. 솜이 생김새는 전형적인 길냥이 두목상이다. 깜냥이와 삼색이의 에비 누렁이 모습이 많이 있다. 윗동네 지인도 자기네 마을의 대장 고양이가 누렇게 생겼다고 한다. 길냥이 대여섯 마리가 상주하는 친구네도 누렇고 얼굴 커다란 녀석이 매번 다른 아이들을 임신시키는 것 같다고... 솜이는 얼굴이 누렁이처럼 크진 않아도 만져주면서 골격을 주무르다 보면 크고 장대하다. 밥 달라고 야옹거릴 때는 천상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지만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뼈대는 삼색이보다 큰 것 같다. 동네 골목대장자질이 벌써 보인다. 이럴 때면 아쉬움이 크다. 대도시라면 솜이의 중성화수술이 쉽지 않았을까, 무거운 숙제를 안겨주는 솜이...


넷. 강아지와 고양이 반려가족

나는 개를 키우고 사랑하는 애견인이었고 애묘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젠 반 애묘인도 된 듯하다.

개는 한결같다. 늘 같은 행동과 마음으로 하나만 바라본다. 그 점이 매력이자 특징이다. 

"충실한 벗"이라는 표현은 개의 특성을 한마디로 귀결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곁에 있는 강아지 아이들, 예측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개와는 확연히 다른 고양이의 특성과 매력, 하나로 표현한다면 "제 멋대로"라는 점인 것 같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마음이 (어떤 사유의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가는 대로 행동이 따라간다. 예측할 수 없다. 많은 냥집사들은 그런 매력대문에 곁에 두고 보살피는지도 모르겠다.

개와 고양이의 특성과 매력은 상반된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길은 어쩌면 개척해 나가야 할 길냥이의 삶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는 앞길이라도 지나온 과거를 거울삼을 수 있는 것은 개들의 특성과 비슷할 수도 있다. 

개나 고양이는 인류 역사와 함께 있어온 동물이다. 개는 사람과 함께 한 가장 오래된 가축으로  반려동물, 사냥 목축등의 여러 필요에 따라 육종 되어왔으며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 신의 형상으로 추앙받고 사랑받았음을 여러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 생명 있는 것들은 소중하고 사랑받아 마땅하지만, 개와 고양이는 조금 더 다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함께 생활해 왔고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세월로 증명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야생의 사자로도 늑대로도 생존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람들 곁에서 남아 온 것 자체가 사람들과 통通했기 때문이 아닐까? 개나 고양이나 각자의 특성이 있어도,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본능에서 통하기에 사람과 가족으로 한 집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하루종일 내리는 비는 묶은 때를 충분히 씻겨내 준 듯한데, 어째 아침밥 달라고 앵앵대는 우리 집 길냥이들의 얼굴은 꿰죄죄해 보인다. 얘들은 화장은 고사하고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뭐 굳이 보여줄 이도 없는데, 세수는 해서 뭐하냐옹~"

"게다가 날도 흐리고 비도 오는데 옹 ~"

"편한 게 제일이라 옹~"

훈수라도 하듯, 그래도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나서기 힘든 인간에게 핑계를 날린다.


       네가 왼쪽 내가 오른쪽

                  엄마가 무거워요 / 에이 내가 위에서 자야지

 배부른 깜냥이 / 실컷 먹고 내려오시는 솜이

 정답게 아침 식사하는  깜냥이와 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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